Q. 설총이 만든 문자 ‘이두’는 어떤 형태였나요? 한글과는 어떤 점이 다른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설총이 고안한 이두는 문자가 아니라 당시의 우리말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말의 어순에 한자의 음과 뜻을 빌어온 표기법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잘 표현한 내용이 있어서 가져와 봅니다 .위의 내용은 우리가 잘 아는 동요 비행기를 당시 이두식 표기법으로 바꾸어 본 것입니다. 떴다 떴다의 경우 '떴'은 '뜨나', '날다'의 뜻이므로 飛(날 비)자를 가져왔고 '다'는 음만 차용하여 多(많을 다)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높이 높이의 경우 '높'은 高(높을 고)를, '이'는 음만 차용하여 耳(귀 이)를 가져왔습니다. 즉 명사, 동사, 어간 등 뜻이 있는 한자를 쓰고, 조사나 어미에는 음만 차용하는 방법을 사용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원래 중국어의 어순은 우리말의 어순과 다르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웠다면, 이러한 이두식 표현법은 한자를 알고 있으면 우리말의 어순대로 표현할 수 있어서 신라 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에도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Q. 바다를 뜻하는 영어단어에 대한 질문입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말씀주신 바다와 그 지역을 뜻하는 단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beach : an area covered with sand or small rocks that is next to an ocean - 모래사장, 자갈이 있는 해변, 바닷가를 뜻합니다.coast : the land along or near a sea or ocean - 바다와 큰 땅이 맞닿아 있는 지점, 해안 경계로 만들어진 지역을 뜻하는데 사람들이 사는 마을(지방)이 만들어진 곳을 지칭합니다.ocean : the salt water that covers much of the Earth's surface - 일반적인 바다보다는 구체적으로 특정된 큰 바다를 뜻합니다. 인도양, 대서양, 태평양 등sea : the salt water that covers much of the Earth's surface - 일반적 의미의 바다를 뜻합니다.추가적으로,shore : he land along the edge of an area of water - 호수든 바다든 땅과 맞닿아있는 해안을 일반적으로 말합니다. bay : a large area of water that is part of an ocean or lake and partly surrounded by land - 섬처럼 동떨어지지는 않았으나 육지를 둘러써 물이 들어와있는 지역을 뜻합니다.
Q. 조선 건국 초기, 왜 고려의 정치제도를 그대로 사용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나라가 바뀌었을 때 초기에는 급작스런 변화에 국정 운영이 혼란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한 기틀은 그대로 가지고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조선 초기에 고려의 정치 및 행정 제도를 그대로 가지고 간 것도 있고, 폐지하거나 변경한 것도 있습니다. 고려 말에 들어서는 전반적인 관료 조직의 형태가 중앙집권 체제로 많이 자리 잡아 있었던, 중국의 관료 조직을 수용했었기 때문에 중앙집권적 왕권 확립을 위하여 관료 조직은 그대로 가지고 가되 그들이 가질 수 있는 특권 등에 제제를 가하면서 왕권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져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 때는 왕권을 약화하고, 재상 즉 고위 관리들(성리학자)의 힘을 강화해야 한다는 취지가 있었습니다. 신진사대부로 조선건국 주축이었던 정도전이 불씨잡변이라는 책도 썼었으며, 행정, 문화, 사회 전반에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조선경국전이 편찬되었습니다. 이후 이 조선경국전은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를 위해서도 많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태종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정도전을 죽이고,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사병을 없애 고위 관리, 권문세족들의 역성 혁명 위협으로부터 왕권을 보호하여 군은 국가만이 가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중앙 정부는 의정부 6조직계제 시스템을 가지고 갔고, 지방은 8도 체제를 정립시키고 고려 시대와는 달리 모든 곳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였습니다. 8도에는 관찰사를, 부, 목, 군, 현에는 수령과 향리를 파견하였습니다. 고려의 향리는 권력이 있었으나, 조선의 향리는 권력이 없었다고 볼 수 있는 단순 공무원이었습니다. 성리학자 세력이라고 볼 수 있는 사림은 유향소(여론형성), 서원(인재양성), 향약(농민관리)을 통해서 지방의 권력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중앙 정부에서도 신경을 많이 썼다는 것이 경재소를 만들어 유향소를 감시하였습니다.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인재등용에 있어서 천거와 문음(음서제도)가 있기는 하였지만, 고위관직에는 불가능하게 제도를 개선하였고, 고위 관직에 오르기 위해서는 조선시대에는 과거시험을 통해서 오를 수 있었습니다. 과거시험은 문과/무과/잡과로 나누어 실시하였고, 고려시대에는 무과는 없었으나 신설되었고, 불교국가라 승과를 시행하던 고려와는 달리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조선 시대에는 승과를 폐지하였습니다. 이후 왕의 성향에 따라 중앙집권을 느슨하게 했다가 조였다가 하였지만 전반적으로 조선시대는 왕권강화 및 중앙집권체제 강화를 주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Q. 한국 원불교의 역사가 그렇게 오래지는 않은 것으로 앎니다 누가 원불교를 창시 하였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원불교는 1916년 4월 28일에 여러 종교 및 사상의 수행자였던 소태산 박중빈이 창시한 새로운 종교로 일원상의 진리와 함께 불법의 생활화, 대중화, 시대화를 추구한다고 합니다. 이름이 원불교라 불교 내 하나의 종파로 오해할 수 있지만, 불교계에서도 다르게 보고 있는 별개의 종교라고 합니다. 창시자가 불교, 동학, 도교, 유교, 기독교의 경전을 두루 공부하던 수행자였는데, 그 중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가장 감명을 받아 불교의 법문과 논리가 사상적 기반이 된 것은 맞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불법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모았고, 임시 교명으로 사용하다가 1943년 6월 1일 박중빈은 대종사의 이름으로 열반(사망)하였고, 2대 대종사로 정산 송규가 이어받았고, 일제에서 해방된 후 1948년에 원불교라는 정식 교명을 선포하였다고 합니다.
Q. 야인시대의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란 것이 팩트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사실로 판명된 일로 판단됩니다. 우선 안동김씨 족보에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로 올라가 있고, 호적에도 김좌진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김좌진은 부인이 여럿이었는데 정실부인과 다른 부인들이 김두한을 김좌진 아들로 인정하고 일제 시대와 김두한 사망 이후 1980년대까지도 김두한이 김좌진 아들임을 증언했다는 것을 볼 때 사실이라 확인됩니다. 일제시대 김좌진 아들 김두한을 요주의 인물로 지정하고 감시했던 일제시대 공식문서가 있고, 김두한이 어렸을때 김좌진 아들이라며 행적을 보도한 당시의 각종 신문기사도 존재하며, 해방 이후에 김구와 청산리 동지였던 이범석 등 독립운동가들이 김두한을 김좌진 아들로 공식석상에서도 인정하고 발언하였다고 합니다. 도올 김용옥이 거지였던 이가 자신을 김좌진의 아들 김두한이라고 속였다는 음모론을 제기하였었으나, 1990년대에 김좌진의 여러 부인 가족들과 김두한 가족들이 한 가족으로 방송 다큐에 출연하여 가족이 확실함을 밝혔습니다. 그게 사실이 아니라면 거지 하나가 안동김씨 가문 전체와 국가와 언론과 일본까지 다 속였다는 것인데 사실상 불가능하고, 그에 따른 공식 기록들이 사실로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사실상 국내의 여러 매체의 내용보다도 철두철미한 일본 정부에서 김좌진을 잡고자 그의 아들인 김두한을 종로를 벗어나지 못하게 철저하게 특별 감시하였다는 것만 보아도 사실 관계가 확인되었으니 그랬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Q. 고구려의 연호는 언제부터 사용 된건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대한민국에는 고구려에 대한 유물이나 사서가 거의 없는 관계로 확인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보통 광개토태왕비문 기록되었는 영락이 최초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중국의 사서에서는 신라와 발해의 연호 사용에 대해서는 기록되어있고, 특히 발해에 대해서는 연호가 바뀔 때마다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만 북한학계에서 발표한 바로는 발견된 고구려 유적에서 나와있는 것으로 영락 이전에도 사용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태왕명 / 사용확인년도 / 연호 / 발견 유적 소수림태왕 / 374-377년 / 태령 / 집안성벽 명와광개토태왕 / 391-412년 / 영락 / 광개토태왕비 (비문 기록으로 다른 설 없이 확실성 인정)장수태왕 / 413-419년 / 연가 / 연가명 금동 여래상 / 451-472년 / 연총 / 서봉총 은합우 / 472-479년 / 건흥 / 건흥명 금동 불상문자명태왕 / 508-511년 / 백선 / 곡산군 경4년 불상양원태왕 / 544-546년 / 태화 / 신포시 금동판평원태왕 / 565-571년 / 영강 / 영강명 불상 광배====================================광개토태왕비문에 기록되어있는 영락은 이견 없이 확실하게 인정된 것이고, 나머지는 유물에서 확인되었으나, 정확한 시기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이견이 있는 듯 합니다. 고구려를 이은 발해 대진국의 경우도 초기부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도 초기부터 연호를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일 것으로 판단됩니다. 광개토태왕 이전의 경우 근거가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확실하게 인정된 광개토태왕 시기 영락 이후에도 유물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 시기가 명확하지 않더라고 확실하게 연호를 사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Q. 통일 신라 신분제도는 어떻게 나뉘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골품은 뼈[골(骨)]의 등급[품(品)], 곧 타고나는 신분을 뜻합니다. 신라시대부터 있었고, 통일신라가 되면서 일부 변경되었습니다.골품제는 신라 지배층, 곧 귀족을 등급으로 구분하는 신분 제도인데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의 다섯 등급으로 나누어 관리하였습니다. 그 아래로 3,2,1두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특별한 혜택도 없고, 일반 백성과 구분의 필요성이 없어지면서 사라진 것으로 판단됩니다. 또 성골의 경우도 진덕여왕을 마지막으로 소멸되어 통일 신라 시대에는 진골, 6, 5, 4두품의 4개 등급만 존재하였다고 합니다.골품제는 골제와 두품제로 나뉘어서 관리되었고, 왕과 고위관리가 될 수 있었던 성골, 진골의 골제, 그 이하 관리와 귀족층을 구분하는 6, 5, 4품제가 그것입니다. 사실상 이것은 왕경, 즉 수도권에서만 운영되던 제도이고, 지방의 호족들은 4, 5품의 대우를 해주기는 하였으나 실질적으로 두품제를 시행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즉 신라에서는 수도권과 지방권을 분리하여 관리했다고 볼 수 있네요.골품제는 그들의 골품을 유지하기 위해서 근친혼을 한다던가 동일계급간 혼인을 하는 폐쇄적인 신분제도였기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