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늦은 나이에 글작가로 시작하는 분들도 있으실까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작가에 있어서 나이와 경험이라는 것은 더 좋은 양분이 됩니다. 당연히 지긋이 나이가 들어 작가로 데뷔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우치다 야오스라는 일본 작가는 마흔 일곱에, 마쓰모토 세이초도 마흔 일곱에 추리소설 작가가 되었고, 시바타 도요는 아흔아홉에 시인에 등단했습니다. 수전 티베르기앵은 쉰에, 윌리엄 스타이크는 예순둘에 동화작가가 되었고, 여든넷에 슈렉을 썼습니다. 시드니 샐던은 쉰에 소설가가 되었습니다. 좋아하는 장르의 책을 많이 읽고, 가지고 계신 경험과 생각으로 잘 풀어내는 글쓰기 연습을 하신다면, 누구나 어느 순간에도 작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화이팅하세요.
Q. 안동지방에는 배추전이 제사상에 올라간다는데 맞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안동 지역의 배추전은 지역 사투리로 배차전이라고도 하며, 평상 시에도 많이 먹고, 의례 음식으로 빠지지 않는 음식입니다. 배추전은 먹고 살기 힘들었던 시절 경북 안동 지역의 산골에서 끼니를 떼우기 위해 만들어진 음식입니다. 가을 추수가 끝난 후에도 먹을거리가 풍족하지 못했던 지역에 그나마 많은 것이 배추였는데, 밭고랑에 버려진 배추 시래기를 가져다가 전을 부쳐 먹었던 것이 그 시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생은 양반가의 음식과는 거리가 먼 음식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며 경북의 다른 지역까지 일상화되게 되었고, 이에 지역을 대표하는 향토음식으로도 자리매김하여 여러 의례에 올라가는 음식이 되었습니다. 안동 지역 뿐만 아니라 의성, 영양, 봉화, 청송, 영주, 예천, 상주 등에도 퍼져있고, 비슷한 음식으로 무를 갈아서 전분과 섞어 만드는 무전도 있습니다. 둘 다 아주 담백하고 맛있습니다.
Q. 왕궁에 문을 열어주는 궁녀는 교대로 근무를 했을까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궁녀는 대개 격일제 근무였다고 합니다. 야간 근무를 서는 지밀 궁녀의 경우는 하루를 주야로 나눠서 2교대로 근무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군에서 밤에 숙소를 지키는 불침번과 같은 것으로 흔히 이를 번(番)살이라고 하였습니다. 번살이는 이미 궁녀 초입 시절부터 시작되지만, 초입 즉, 견습나인일 때는 야간 근무는 하지 않고 낮에만 보조자로 근무하며 업무를 교육받았다 합니다.지밀의 번살이는 관례를 올린 뒤부터 번은 2인 1조로 2인씩 4인이 주야로 교대근무하며, 일정 기간을 두고 주야의 근무를 서로 교대하여 피로누적을 덜하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근무의 교대 시간은 오후 3~4시와 새백 3~4시라고 하는데 계절에 주야의 길이가 달라지므로 그에 따라 일부 조정하였다고 전해집니다.
Q. 우리가 역사를 배울 때 조선사회를 전기와 후기로 크게 나누는데 이렇게 나누는 의의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보통 고대 국가들의 역사를 볼 때 건국 시점부터의 패망할 때까지 흥망성쇠의 4단계로 봅니다. 조선을 전기 후기로 나누는 것이 확고한 정설은 아니고 여러가지 견해가 있는데 어떤 기준으로 전기 후기로 나누는 경우가 많은 듯 합니다. 조선을 시기별로 나누는 방법에 대한 견해를 아래에 정리해보겠습니다 한국사학계의 주류인 서울대학교에서는 관학파 집권기를 전기, 사림파 집권기를 중기, 세도정치기를 후기로 3기로 구분해서 봅니다. 시대 구분으로는 전기와 중기를 근세로, 후기는 근대 태동기로 개항 이후는 근대로 보는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고려대학교에서는 서울대학교의 그러한 견해를 짜맞추기식의 궤변이라고 비판하며, 그냥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조선 전기-후기로 시대를 구분하고, 개항 이후 대한제국 멸망까지 근대로 편입하여 구분하고 있습니다. 현재 사학계에서는 주류인 서울대를 따라 3분법으로 파악하는 관점이 강하고 합니다. 하지만 전기 중기 후기로 넘어가는 시점의 변화가 정치세력의 교체 외에 시대를 구분할 만한 근원적인 변화가 모호하기 때문에 여전히 학계에서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현행 검정교과서에서는 조선의 시대 구분에 3시기 구분을 쓰고 있는데,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기준으로 조선 전기와 후기를, 흥성대원군의 집권을 기준으로 조선 후기와 말기를 구분 짓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서울대학교의 견해와 그에 문제를 제기하는 여러 의견들을 절충하여 사회, 문화 부분에서 관학파 및 훈구파와 사림파 집권기의 구분이 비교적 뚜렷하고, 병자호란을 대개 조선 후기로 배치하는 두 사관을 종합한 것으로 제시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외세의 침략에 의한 전쟁을 기준으로 구분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라고 하여 각각 100년 단위로 분리하여 15세기 훈구정치기, 16세기 사화시기, 17세기 붕당정치기, 18세기 탕평시대, 19세기 세도정치기로 구분해서 이해하려는 의견도 있고, 그러한 참고서적도 나와있습니다. 다만 19세기는 고종의 즉위 시점으로 변화가 심해 그 전후를 조선전기후기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여러가지 견해들의 종합하여 조선을 3개의 시대로 구분하여 전기, 후기, 근대사회의 식으로 구분하는 것으로 한국사검정시험에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Q. 조선시대 정치에서 어떤 이념과 사상이 중요한 역할을 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은 성리학의 기반에서 세워진 나라입니다. 결국에 죽임을 당하였으나 개국공신인 정도전은 고려시대 무신들의 폭정에 의한 국가 운영에 환멸을 느꼈고, 성리학을 바탕으로 세워진 나라를 꿈꾸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성계는 변방의 실력자로 충분히 왕이 될 자질을 갖춘 대상이었습니다. 그렇게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선봉장은 이성계를 필두로한 무인 세력이었으나, 그 국가 통치이념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였습니다. 조선 건국 이후 원래 무인세력이었던 이씨조선이 무인들을 기반으로 정치를 펼 수 있었지만, 이후 똑같은 무인들에 의한 세력다툼이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하여 점차 무인들의 세력을 약화시켜나갔습니다. 특히 태종 이방원의 경우 자신의 스승이자 개국공신인 정도전을 죽게 하였지만, 자신이 왕이 되는 과정에서도 형제들까지 숙청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성리학적 통치이념을 더욱 강화해나갔습니다. 이에 조선의 조정에는 성리학의 학파에 따른 사림들이 출몰하였고, 그에 따라 알력과 이해충돌이 되면서 지금처럼 당파가 나뉘게 되고 붕당정치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집단들이 왕권과 인척관계를 맺음에 따라 더더욱 권력을 강화시켜가게 됩니다. 즉 조선시대는 성리학 기반의 학연과 혼인 관계에 의한 혈연이 통치 및 권력의 주요 요소였습니다. 이에 당시 성리학의 근원지인 명에 고개를 숙이는 정치를 하였습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을 뜻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당시의 중화사상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리학은 순수한 학문이라기보다 교조화되고 정파화되어 단순한 통치이념으로 각인되었기에, 조선 중기 이후부터 학문이 실제 생활과 접목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가치가 제기되면서 실학이 대두되었고, 당시의 개혁사상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실학은 국가운영에 대한 중심에 설 수는 없었고, 병폐가 만연한 성리학의 동떨어진 현실감을 비판하는 정도의 운동이었지 않나 생각합니다.
Q. 삼국시대~조선 시대에는 복층 건물은 없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까지는 복층건물도 많았다고 합니다. 신라시대에 건축되었던 황룡사 9층 목탑(고려 고종 25년 몽골 칩입 때 화재로 소실)을 건축했던 것만 보아도 고층으로 목조건물을 지을 수 있는 기술이 있었다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까지는 입식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한옥도 복층의 건물도 있었습니다. 온돌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사용되어 왔지만, 조선시대 경신대기근이라는 재난 이후로 본격적으로 온돌이 보급되었습니다. 대부분 목조건물을 토대로 한 것이 대부부이었기에 온돌은 1층에 자리하게 되었고, 지금의 보일러 시스템 기술수준이 아니었기에 2층가지 온돌을 놓기는 어려워 단층 위주였고, 복층이 있더라도 1층은 생활공간 2층, 3층은 서고 또는 창고 형태로 사용했다고 전해집니다. 기술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죠. 궁궐에도 경회루의 경우 지금의 필로티 방식으로 1층은 기둥으로만 되었고 2층이 연회를 할 수 있는 자리로 되어있었던 것을 보면 고층을 지을 수 있는 기술은 있었다고 보입니다. 온돌의 사용과 그 생활의 고착화로 점차적으로 복층의 한옥 등은 사라지게 되었다 추측됩니다. 서민들의 초가집은 구조상 복층 자체가 어려웠을 것입니다.그리고 고려시대까지는 황제국가이었고, 조선시대는 성리학자들의 기반으로 세워진 나라로 명나라를 대국으로 인정하는 외교를 펼쳤기에 궁궐도 명나라보다 크고 화려하게 짓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이에 민가들도 궁궐보다는 낮고, 작게 지었다는 설이 있는데 그것은 복층의 한옥이 조선말기~일제강점기에도 남아있었기에 그 이유는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궁궐은 상징적인 건물이니 그랬다 해도 민가는 복층 건물이 존재했으니까요. 현재는 보일러 기술이 발달하여 최근에 지은 한옥촌의 한옥들은 2층 이상으로 지어지는 곳도 많이 보입니다. 한옥의 기술과 우리나라 온돌 기술을 더욱 발전시켜 더 높고 멋진 한옥들이 많이 지어졌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