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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을 공유하고 모르는 것을 함께 공부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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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준 전문가
맑은글터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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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요즘도 환갑잔치를 하시는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요즘은 환갑의 경우 잔치를 하는 경우는 많이 없어졌습니다. 평균수명이 늘어난 지금 환갑의 경우는 건너뛰고 칠순이나 팔순 등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과거에는 수명이 짧기 때문에 12간지가 5번 돈 60년을 1갑자라고 하여 건강을 기원하기 위해 많이들 했었는데 지금은 간단하게 가족들간에 모여서 축하하는 자리로 축소되고 잔치는 많이 없어진 것 같네요. 그러니 아쉬우시면 가족들끼리 모여서 식사하시면 건강을 축원해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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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한자가 우리동이족이 만든문자라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한자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인 상(은)나라의 갑골문자에서 발전하였다는 것은 중국학계에서도 인정하는 정설입니다. 이것이 주나라, 춘추전국시대, 한나라 등을 거쳐오면서 점차 현재와 가까운 한자 형태로 자리 잡았습니다. 중국은 여러개의 민족으로 이루어진 나라이므로, 우리 대한민국의 조상이 동이족이라 할 지라도 중국은 자신들의 것이라고 합니다. 뭐 그것까지 반박할 생각은 없고, 그 문자의 뿌리가 우리 민족의 조상과 관련이 있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라 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한자가 우리의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세계의 역사는 모든 것이 관련되어있고, 이어져 있습니다. 관계를 소유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한자는 원래 그 명칭이 없다가 몽고가 중국을 통일한 원나라 때 몽고의 문자와 구분하기 위해서 이후 중국의 상위 지배세력이던 한족의 문자라는 명분을 입혀 한자라고 한 것입니다. 중문대사전에서도 [한자는 곧 한족인의 문자라는 말인데, 몽고문자와 대칭해서 말한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뿌리가 고대 환국(정설로 인정되고 있지는 않음)을 거쳐, 고조선, 부여, 삼한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 고려, 조선의 고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동이족은 고대 환국과 고조선, 부여, 삼한, 고구려, 백제와 관련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우리 민족의 대륙사관을 주장하는 분들이 최근에 더 많아진 것은 사실입니다. 모두가 역사에 대해 진심이시니 존중합니다. [후한서]에 [동이전]에 동이의 뜻과 동이족의 국가에 대해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한자의 모체인 갑골문자가 동이적의 터전인 은허라는 곳으로 하남성 안양현 소둔이라는 지역입니다. 이곳에서 기원전 2,500년 경에 갑골문화가 발해연안에서 발달하였다가 기원전 18세기에 동이족이 중원으로 진출하여 은나라를 세우고, 그 문자를 발전시켜, 주나라,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한나라 때 그 꽃을 피웠다 하니 기원이 동이족에 있다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우리도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한자를 빌어다 썼습니다. 한글은 소리글이다 보니 모든 소리를 표기할 수 있어, 점차 한자를 멀리하게 되었지만, 우리의 일상에 쓰는 많은 단어들은 사실 한자어가 많습니다. 그만큼 중국과 우리가 밀접한 문화권입니다. 대표적으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도 한자이죠.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문자를 만드는데 있어 재주가 있었나 봅니다. 갑골문자를 만들고, 거기서 형태를 변형하여 지금의 한자의 기본틀을 만들고, 동쪽 끝으로 이주한 그 후예들은 한글을 또 창제하였으니 지금의 문화강국이 되어가는 이유가 다 고대부터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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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과거 백제는 어떻게 세워진 나라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 두 가지의 건국설화(建國說話)가 있습니다. 두 아들인 온조 중심의 설화와 비류 중심의 설화입니다. 어떤 것이 정설인지는 명확하지는 않았으나, 둘다 그 뿌리가 부여족이고 고구려 건국 태조인 주몽과 관계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온조 중심의 설화에는 온조가 고구려 건국자인 주몽과 졸본왕녀 소서노 사이에서 태어났고, 그렇게 살아가던 중 잃어버렸던 아들인 주몽의 원자인 유리가 찾아와 태자가 되고, 비류와 함께 고구려를 떠나 위례에 정착하여 나라를 세우고, 비류가 죽자 그를 따르던 무리들을 통합했다고 합니다. 비류 중심의 설화에서는 비류는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와 소서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우태가 죽은 뒤 주몽이 졸본으로 망명하고 소서노는 주몽과 재혼하여 고구려 건국을 함께 했다가 마찬가지로 주몽의 원자인 유리가 찾아와 태자로 책봉되자 비류가 소서노와 그를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남으로 내려와 미추홀에 정착하고 나라를 세웠다고 합니다.처음에는 하북위례성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십제(十濟)’라고 하였다 하나 초고왕 때 중심지를 하남위례성으로 옮기고 국호를 ‘백제’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백제는 이후 온조계의 부여씨가 왕위를 이어갔는데, 당시의 상황을 비류계의 부족과 온조계의 부족이 함께 연맹국가로 지내오고 비류계가 더 성장하다가 비류가 사망하고, 그 부족을 온조가 흡수하여 하나의 연맹국가 체계로 나갔다는 설이 있고, 비류가 온조와의 왕위 쟁탈에서 밀리자 바다 건너 일본으로 넘어가 일본의 천황가의 뿌리와 관련이 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일전에 일본의 천황이 자신들의 핏줄이 백제의 왕가와 관련이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당시 일본으로 건너간 비류와 일본의 왕가가 혼인을 하고 양국의 교류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실제로 아신 백제의 경우 당시 왜에 대해 정치적 영향력이 있어 고구려와의 전쟁 때 동참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백제는 단순히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고, 소서노의 가문이 상인가문이었던 장점을 활용하여 왜, 중국 남부 지역에 실질적으로 정치, 경제적인 영향력을 가져 실제 제후국을 가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그 영토 등이 어느 정도 확장되었던 것인지 그냥 교역 정도의 관계인 것인지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나라의 사료에는 백제의 영토가 한반도로 국한되어 있고, 백제의 22담로와 중국의 사서에서의 일부 백제의 영토를 중국 남부 일부까지로 기재해 놓은 것도 있다고 합니다. 맞다 아니다로 학자들이 논쟁하고 있죠. 정확한 것은 우리 역사학자들께서 계속 연구하실거라 생각됩니다. 다만 우리 백제의 문화가 중국, 일본 등에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었던 글로벌한 문화였다는 것은 사실인 듯 합니다. [참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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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유명한 명화 모나리자에 눈썹이 없는 이유?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모나리자의 눈썹에 대한 이 질문은 여러번 있어왔는데 매번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네요.모나리자 그림에서 눈썹이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사실 확인할 방법이 없어서 가설만 제기되어 있습니다.1. 시대적으로 이마가 넓은 것이 미인상이었기에 애초에 눈썹을 그리지 않아 더 아름답게 보이고자 했다2. 세월이 흐르며 여러가지 환경에 의한 변질에 의해 바래졌거나 눈썹 부위가 떨어져 나갔다.3. 눈썹을 그리지 못했거나 실수로 그리지 않은 미완성작이다.라는 설이 있습니다.본인의 생각으로는 위 가설들 외에 화장을 위해 눈썹을 밀어버리고 그리는 분들이 계신 것처럼 당시 모나리자가 눈썹을 밀었고 화장 안 한 상태의 민낯을 그렸거나, 눈썹숱이 적고 피부색과 비슷하여 거의 보이지 않게 그린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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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모듬회,모듬생선구이와 같이 "모듬"이란 단어는 어떤 말에서 파생되었고, 정확한 뜻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모듬'과 '모둠’은 현대국어 ‘모으다’의 옛말, '모드다‘, ’모두다‘의 어간에 명사형 어미(또는 명사 파생 접미사) ‘-ㅁ’이 붙어서 형성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모드다', '모두다‘는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 말이지만, 중국, 북한 등의 일부 지역에서는 ’모으다‘의 의미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원적으로는 '모둠', '모듬'이 다 가능한 것으로 보나, ‘모둠꽃밭’, ‘모둠냄비’, ‘모둠발’, ‘모둠밥’과 같이 ‘모둠’이 들어 있는 여러 단어가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모둠'을 표준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라고 합니다. 말씀하신 '모듬'의 어원도 이와 관련된 것으로 판단됩니다.모둠'과 '모듬'은 어원적으로 옛말 '몯-'에서 온 말이며, 통시적으로 '모둠'과 '모듬'의 형태가 모두 쓰여 왔고, 이들 형태는 합성어를 만드는 단어 형성 과정에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현재 ‘모두다’는 방언으로 쓰이고 있고, ‘모드다’는 쓰이지 않으므로, 이들의 명사형인 ‘모둠’이나 ‘모듬’도 표준어는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하지한 음식과 관련하여서 현재 '모둠밥', '모둠냄비'와 같이 쓰이는 말이 있으므로, 모듬회, 모듬생선구이의 경우도 ‘모둠’의 형태인 '모둠회', '모둠생선구이'로 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참조 - 국립국어원 온라인 가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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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언제 왜 바뀐건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 최초의 초등교육기관은 소학교였습니다. 그러다가 소학교가 보통학교령에 의해 보통학교로 바뀌었었다고 합니다. 다시 1926년 7월 1일 소학교령에 의해 소학교, 보통학교 구분없이 심상소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941년 일제칙령 제148호 '국민학교령'에 의해 국민학교로 새롭게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바꾼 이유는 황국신민을 양성한다는 일제강점기의 초등교육정책을 반영한 것으로 나치독일의 전체주의 교육을 상징했던 Volksschule(폴크스 슐레)에서 연원하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식민지 시절의 가슴 아픈 잔재였습니다. 이에 대한민국 교육부는 광복 50주년을 맞이하는 1995년 8월 11일에 일제의 잔재를 없애고 민족정기를 정립하기 위해 국민학교의 명칭을 변경하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1995년 12월 29일 교육법을 개정하여 다음 해인 1996년 3월 1일부터 기존에 사용하던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변경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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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익룡이 공룡이 아니라니? 이게맞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정의 상 공룡은 '중생대 육지에서 살았던 파충류'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늘과 바다에 살았던 파충류인 익룡과 어룡(수룡)은 공룡이 아닌 다른 분류입니다. 공룡은 신체적인 특징으로 안구 뒤쪽이나 턱에 측두와라고 하는 구멍이 있습니다. 다리 모양 등도 다른 파충류와는 구분이 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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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왜 신라에만 여왕이 존재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가운데 여왕이 있었던 나라는 신라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신라에 있었던 특이한 왕위 계승 제도에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그 내용에 대해 조사한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서기 631년 진평왕이 죽은 후 신라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진평왕은 왕위를 물려줄 아들이 없었고 그의 형제마저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왕의 친척 중에 선정하여 왕의 자리를 이어받으면 되지 않나 지금의 생각으로 의구심이 들 수 있지만 신라 왕실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골품제도라는 신라의 왕족제도 때문입니다.6개의 부족이 모여 살았던 일종의 6부족 연맹국이었던 신라는 법흥왕 무렵 고대국가로 성장하여 부족은 사라지고 그 지배층은 서라벌로 모여들어 높은 관직을 부여받습니다. 6부족이어서인지 신부계급을 여섯 단계로 나눈 6두품 제도를 실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왕위를 이을 왕족은 성골과 진골로 나누었습니다. 성골은 왕의 직계 자손, 진골은 왕의 친척들로 구분하였습니다. 진평왕이 사후 궁에는 남자 성골이 없었지만, 아들이 아닌 선덕 공주가 있었습니다. 왕실에서는 회의를 거듭한 끝에 골품제를 지키기 위해 선덕 공주가 왕의 자리를 이어받아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고 처음으로 여왕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선덕여왕은 남자가 왕이었을 때보다 오히려 나라를 강하게 다스려 국제관계에서 신라의 지위는 더욱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선덕여왕이 죽자 역시 왕실에 남자 성골이 없었기에 다시 한번 사촌인 진덕여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신라 역사에 있어서 2번의 여왕을 거치게 된 것입니다.진덕여왕이 죽은 다음에는 왕실에 여자 성골마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성골보다 한 단계 아래인 진골에서 왕을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이가 바로 태종무열왕 김춘추입니다. 그가 왕이 되고 신라는 당의 힘을 빌려 안타깝기는 하지만, 삼국을 통일하게 됩니다. 우리 민족의 고대사에서는 신라만이 여왕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외국의 경우에는 최근까지 왕위를 한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있듯이 여왕이 있어왔습니다. 외국에서는 고대문명에서부터 나이지리아의 아니나 전사 여왕, 고대 켈트족의 부디카 여왕, 멕시코의 카를로타 여왕, 페르시아의 에스더 여왕, 중국의 부호여왕, 측천여제, 고대 이집트의 하트셉수트 파라오, 일본 최초국가 야마타이 히미코 여왕(무녀이자 군주), 수메르의 푸아비 여왕, 영국의 빅토리아, 엘리자베스 여왕 등 많은 여왕들이 존재했습니다. 대부분은 모계사회의 고대 부족국가의 경우 여왕이자 무녀, 신녀로 통치하는 경우가 많아 그랬었고, 제대로 된 국가의 형태를 갖추면서는 대부분 갑자기 왕이 서거하거나 하여 그 왕후가 왕이 되거나, 직계 혈통 등의 문제로 서열에 따라 여왕이 되는 경우인 듯 합니다. 우리 역사의 선덕여왕, 진덕여왕도 직계혈통 및 서열에 따라 특이한 골품제도에 의해 왕이 된 경우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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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율곡이이의 십만양병설이 당시 조정에서 무시됬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의 학자였던 율곡 이이는 언젠가 왜구가 조선을 침공할 수도 있으니 그에 대비하여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선조8년 심의겸과 김효원이 서로에게 악감정을 가지며 반목하고 갈라서면서, 다른 학자들 또한 출신 등에 따라 남인과 서인,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당파 싸움을 하였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율곡 이이(서인)와 서애 유성룡(남인)은 서로를 존경하고 인정하는 사이였으나, 이이가 경연에서 ‘미리 10만의 군사를 양성해 변란에 대비해야 한다’고 문제제기하자, 류성룡은 ‘군사 양성은 재앙의 단서를 키우는 것’이라며 매우 강력하게 반대했다고 합니다. 200년간 평화가 지속되었고, 군사를 양성하게 되면 국가재정이 무너진다는 이유로 결국은 조정에서 부결되게 된 것입니다.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후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게 되었습니다.하지만 임진왜란 때 이이와 유성룡이 모두 이순신을 추천한 것을 보아 정치적인 방향이 달라 서로의 의견에 반목하였다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유성룡은 같은 남인의 지인에게 "개혁은 옳은 일이지만 그것을 율곡과 함께 할 수는 없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이상한 이야기도 들립니다. 율곡이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는 구체적인 근거자료 등에 시기에 맞지 않은 시호가 있는 등 의심스럽다는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사실상 임진왜란 이후에 서인 쪽 후학들이 남인과의 적개심을 가중시키고 임진왜란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돌리기 위해 스승 격이던 율곡의 의견을 서애가 반대하여 결국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그 세력에 죄를 씌우기 위해 그랬다는 당쟁의 소산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고 합니다. 역사학자들이 사료와 토론을 통해 밝혀내겠지요. 뭐가 사실인지는 아직 명확하지는 않지만, 예나 지금이나 정치인들은 참....그렇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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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성악설과 성선설중 어떤게 진짜 맞을까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성선설과 성악설은 논쟁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존재로 태어납니다. 성장하면서 무엇을 듣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그 존재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저마다의 천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 천성이 호전적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하다고 하여 악하다 선하다를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전부터 사람들은 양면적인 성향을 모두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그 중 가장 합리적이고, 더불어 사는 삶에 합당하다고 하는 것을 규범으로 정하고 그 것에 부합하면 선이고 그렇지 않으면 악으로 구분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질서를 위함이지 진정한 선악을 구분함이 아닙니다. 집단에서의 선과 악, 개인에서의 선과 악은 그 판단이 다르다고 봅니다. 누군가가 살인을 했다고 하면 그것은 집단의 논리에서 위법적인 행위를 한 것이므로 악이라 분류됩니다. 하지만 개인의 상황에 빗대어 보면, 한 가장이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살인범에게 복수한 것이라면, 물론 집단의 논리에서 위법적인 행위이므로 처벌을 받아야 하는 악행이지만,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가족에 대한 복수를 한 것이므로 정의를 구현한 선행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집단의 규범을 어겼으니 법치주의 국가에서 처벌을 받아야 하겠죠. 어떤 이가 자신의 부족을 침략하여 도륙하고 있는 침략자에 맞서서 그들을 죽였다면, 그는 악인일까요? 그는 살인이라는 악행을 저질렀지만, 부족과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선한 가치를 지켰으니 부족의 입장에서는 선행이라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침략자 쪽의 부족이나 가족들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가족을 죽인 그를 악인으로 여기겠죠. 선과 악은 법과 규범이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로 구분한다고 생각됩니다. 과거 철학자들이 책상머리에 앉아 논쟁하던 성선설과 성악설은 강력한 법과 규범이 필요한가, 그렇지 않고 인간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가를 논쟁하면서 불거진 것이지 인간이 태초에 선하거나 악하거나 하는 것에 대한 답을 구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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