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터키가 튀르키에로 국호를 바꾼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터키라는 단어는 영어철자로 Turkey로 칠면조라는 뜻과 겁쟁이, 패배자 등을 뜻하는 속어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에 자국의 국민성 및 국가의 정체성을 제대로 대표하지 못하고 훼손한다고 생각하여 터키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법령을 선포하고, “튀르키예는 우리 문화와 문명, 가치를 가장 잘 표현한 단어”라고 선언하며 국호를 바꾸겠다고 하였습니다. 튀르키예는 터키어로 ‘튀르크인의 땅’을 뜻하고 ‘튀르크’는 ‘용감한’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이에 지난 6월 2일 유엔에서는 해당국의 요청에 따라 국가 이름을 ‘Turkey'(터키)에서 ‘Türkiye'(튀르키예)로 대체하는 것을 공식 승인했다고 발표했다고 합니다.
Q. 당나라가 신라를 도와준 이유가 뭔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당은 삼한의 땅, 즉 한반도 전체를 정복하겠다는 야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발판으로 중원의 강대국이었던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한반도로 진출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의 초대황제인 이세민은 강력한 고구려의 국방력에 막혀 이뤄내지 못하였습니다. 당시 가장 약했던 신라만이 고구려와 당 모두에 사신을 통해 외교를 하며, 국력을 기를 시간을 벌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백제는 가장 먼저 중원땅에 진출하여 중국 이남지역에 제후국을 가질 정도의 국력을 자랑하여었으나, 이후 그 영향력이 줄어들었고, 한반도 내에서 고구려, 신라와 잦은 영토 분쟁 등을 하면서 쇠약해진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마찬가지로 고구려도 연개소문이 사망한 후 그 아들들이 권력 다툼을 하며 조정에 내분이 있어 국력이 약해진 상황이었습니다. 당은 이것을 기회로 보고 마치 화친 국가인 신라의 어려움을 외면할 수 없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파병하였고, 결과적으로 백제와 고구려가 연이어 패망하게 되는 결과가 발생하였습니다. 신라가 통일을 이루었나 싶었을 순간 당은 그 야욕을 드러내었습니다. 백제가 멸망한 지역에 5도독부를 설치한 후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라고 칭하며 신라 문무왕을 도독으로 앉히는 행정조치를 합니다. 고구려가 멸망한 지역에 9도독부를 설치하고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면서 한반도 전체를 총괄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신라는 당의 야욕을 무너뜨리기 위해 고구려 출신의 검모잠이 고구려부흥운동을 하는 것을 지원하며, 백제의 옛땅을 수복하였고, 고구려 백제 말갈의 유민들을 복속시키면서 대동강부터 원산만까지의 지역까지를 경계로 한반도의 영토를 회복하는 삼국통일을 완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넓은 만주와 시베리아 가까운 지역까지는 통일하지 못했습니다. 그 쪽은 고구려 장수였던 대중상, 대조영 부자를 중심으로 고구려 핵심세력들과 흑수말갈 등 여러 부족이 연합하여 대진국 발해를 세움으로 고구려 이상의 영토와 영향력을 가진 대국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결국 신라의 삼국통일은 지금의 한반도(대한민국과 북조선인민공화국)로 영토가 한정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고구려나 백제가 삼국을 통일했으면 지금 우리의 영토는 어떻게 되었을까? 대진국 발해가 계속 이어오고 한반도를 이후에 흡수 통일하였으면 우리는 얼마나 큰 영토를 가진 국가가 되었을까 상상하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Q.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 궁금합니다. ㅎ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은, 1891년에 착공하여 1893년에 최종 완공된 약현성당입니다. 서울시 중구 중림동에 자리하고 있고, 당시 프랑스 신부인 E.G.Coste가 설계하였고, 주임신부였던 Doucet의 감독으로 중국인 기술자가 시공하였다고 합니다. 해당 성당은 중림동에 위치하고 있어 중림동성당이라고도 하며, 가장 오래된 근대식 벽돌건물입니다. 지금의 모습은 화재로 인해 복원된 상태이며, 명동성당보다 6년 먼저 지어졌다고 합니다. 내부는 이렇습니다.참고로 한국 최초의 한옥식 성당은 1900년에 건립된 대한성공회의 강화성당이 있습니다. 이름처럼 인천 강화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강화에서 최초로 한국인이 세례받은 것을 기념하여 성공회 초대 주교인 존 코르페가 건립하였다고 합니다. 목재는 압록강에서 가져다가 경복궁 재건에 참여했던 궁궐 도편수가 주도해서 건립하였다고 합니다. 외관은 한국의 한옥 궁궐양식이고, 내관은 바실리카양식이라고 합니다.
Q. 제주도가 왜 돌 여자 바람이 유명한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제주도는 세가지 돌, 바람, 여자가 많다고 하여 삼다도라 불리었습니다.우선 제주도는 화산섬으로 검게 널려 있는 현무암이라고 하는 암석이 많습니다. 그리고 바다에서 섬으로 불어오는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유명합니다. 그리고 적도 부근에서 발생하는 태풍이 북상하는 길목이기 때문에 강한 바람도 자주 오곤 합니다.마지막으로 여자가 많다는 것은 여러가지 정치적, 경제적, 시대적 상황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사실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합니다. 1600년대부터 약 200년 간은 실제로 여성이 남성에 비해 훨씬 많았었다고 합니다. 당시 해조류나 패류는 잠녀라 불리던 여성이 채취하였고, 전복은 포작이라고 하는 남성이 채취하였다고 합니다.이것은 공납과 진상을 위한 것므로 먹고 살기 힘든 시기에 공납과 진상, 노역과 군역, 탐관오리의 수탈 등에 못이겨 남성의 경우 먼 바다까지 가서 뱃일을 하다 목숨을 잃거나 도망가거나 하는 경우가 많아 점차 제주에 남성의 수가 줄어들어 전복 채취까지 여성의 일이 되었다 합니다.현근대에 들어서는 제주도의 유명한 지역은 대부분 바닷가인데 그 해안가에는 물질 하던 해녀들이랑 그것을 파는 현지 여성들이 많이 보여 제주도를 다니러 간 사람들의 눈에는 여자만 많은 것으로 보였을 거라는 추측도 있다고 합니다. 2018년 행정구역별 남녀성비를 살펴보면 여성 100명당 남성수에 따를 성비율이 101.28로 2000년의 98.49에 비해 남성의 수가 더 많은 상황입니다. 아마도 외지인들이 많이 이주하였기 때문으로 판단됩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여자가 많다는 것은 해당되지 않겠네요. 하지만 과거 시대적 상황에서는 확실히 여성이 많았으니 삼다도라 불리었던 것으로 아시면 될 것 같습니다.
Q. 역주변에 윤락가가 많았던 이유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역 주변에 사창가 등이 많이 생겼던 이유는 과거 여행객들이나 현지인들보다는 장사 등으로 인해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상인들을 주고객층으로 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여집니다. 보통 상인들의 경우 전국의 장날을 기준으로 여러 날을 해당 지역에 머무르며 장사를 하곤 했는데, 장사 후 저녁에 술을 마시며 회포를 푸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수요로 인해 생기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보통 차량이 아닌 기차 등의 수단으로 봇짐 상인들이 많이 이동하였고, 그래서 역이 가까운 곳에 숙소들이 많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러한 상인들도 많이 줄어들었고, 대부분 자신들의 차량을 가지고 움직이기 때문에, 역 주변에 생성되어있던 술집이나 사창가 등이 침체되었고, 도시미관 및 사회통념상 공존하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대대적으로 공권력을 이용하여 철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Q.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는 성씨는 몇개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에 등록된 성씨는 현재 각 조사마다 오차가 있으나 1985년도 조사에서는 274성으로 전통적으로 사용해오던 성입니다. 2016년 기준 5,582개로 발표되었고, 그 중에 1,507개가 한자가 있는 성이고, 4,075개가 한글로만 되어있는 성이 있습니다. 성씨 조사는 보통 15년에 한번씩 한다고 하는데 2,000년대 초에도 286개 정도 되었다고 하니 그 외의 성은 대부분 귀화한 성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성씨 제도는 삼국시대에 중국의 성씨제도를 도입하여 사용하였고 고려시대 정착이 되었다고 합니다. 성씨란 단계혈연집단의 명칭입니다. 중국의 경우 성은 부계혈통을 나타내고, 씨는 신분의 귀천을 나타내었으며, 남성은 씨를 여성은 성을 호칭하였다가 후대에 성씨가 하나로 합쳐지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보통 우리나라에서 성을 등록할 때 가족 중 부계나 모계의 성을 따서 하기 때문에 새로운 성이 만들어지는 경우는 드뭅니다. 성과 본에 관한 법적 규정은 재래의 관습인 ‘성불변의 원칙’과 ‘부부각성주의’를 택하고 있습니다. 민법에 “자는 부의 성과 본을 따르고 부가에 입적하며, 부를 알 수 없는 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르고 모가에 입적한다. 부모를 알 수 없는 자는 법원의 허가를 얻어 성과 본을 창설하고 일가를 창립한다. 그러나 성과 본을 창설한 뒤 부 또는 모를 알게 된 때에는 부 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른다 (781조).”라는 규정을 두고 있습니다.우리 나라의 성은 원칙적으로 부계혈통을 표시하며, 성의 변경은 특수한 경우 이외에는 일체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혼인하여 부부가 되더라도 외국의 경우처럼 성을 바꾸지 않으며 각자의 성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민법에서는 입부혼인제도(入夫婚姻制度)를 인정하고 이 경우에 한하여 입부혼인에 의한 출생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르도록 함으로써(826조 4항), 모계혈통을 표시하는 성이 되는 경우도 생겼습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성씨(姓氏))] 앞서 전체 성씨 수에서 이야기했듯이 외국인이 귀화했다던지 하는 경우 자신의 이름을 만들어서 등록할 수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