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어제 축구경기를 보다보니까,, 마직막에 넣은 골을 극장골 이라고 ?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축구경기에서 극장골이란 영어로 Last gasp goal 이라고 합니다. 그 의미는 경기의 막바지에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승부를 뒤집거나 위기를 넘길 수 있게 하는 극적인 골이라는 것입니다. gasp는 '숨을 헐떡거리다', '숨 쉬기 어려운 상태에서 쉬는 짧은 호흡'이라는 뜻인데, 뜻 그대로만 직역하면 '숨을 헐떡거릴 정도로 힘든 마지막에 나온 골'입니다. 비슷한 뜻으로 Last minute goal을 쓰기도 합니다.
Q. 이성계장군은 왜 위화도에서 회군했을까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 말기 최영의 권유로 왕이 요동정벌 추진하였습니다. 그 배경으로는 당시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는 국가로 과거 고구려 땅을 수복하고자 하는 염원은 계속 있어왔던 터라 명분이 있었고, 원나라가 망하고 난 후 부강해진 명나라가 원나라 때 쌍성총관부가 있던 철령 이북의 땅에 철령위를 설치하겠다며 땅을 내놓으라고 무리한 요구를 하였고, 이에 친명 세력이었던 이인임 세력을 몰아내었고, 명나라의 홍무 연호를 폐기하고 북진을 준비하자는 최영의 의견에 우왕이 승인하게 됩니다. 이성계는 조민수와 함께 명으로 진군하면서 위화도 인근에서 압록강 물이 불어나 14일을 진군하지 못하고 머물렀습니다. 이에 이성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옳지 않다/여름에 전쟁하는 것은 옳지 않다/모든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왜적의 침입을 방어할 수 없다/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므로 활의 아교가 떨어져 무기에 문제가 생기고 전염병의 우려가 있다"라는 4가지 불가론을 주장하며 반대하였으나 우왕과 최영은 되려 이성계에게 하루 빨리 강을 건너라고 명을 내립니다. 당시 정치적인 상황으로는 아마도 전쟁을 통해 이성계와 정도전 세력의 역모를 미연에 방지하고, 어쩌면 전장에서 그를 도모하고자 선봉장으로 보냈을 가능성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성계의 요동정벌 반대의 이유가 언급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안위 때문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여러 상황으로 보았을 때 가장 확률이 높은 것은 자신과 가족의 안위이지 않을까 합니다. 실제로 자신이 요동으로 보내지면서, 자신의 가족들은 볼모로 잡혀있었으니까요. 결국 이성계는 조민수와 손을 잡고 위화도에서 회군하기로 결정을 하고 우왕과 최영은 서경에서 개경으로 옮겨 반격을 준비하였으나, 이방원의 책략으로 가족도 탈출하여 걸림돌이 없었던 이성계는 신진군부세력과 함께 쿠테타에 성공하고 우왕을 폐위시키고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이색과 조민수의 추천으로 옹립하고 자신은 좌시중, 조민수는 우시중이 됩니다. 이후 조민수는 모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이성계를 도모하고자 하였으나 되려 반격 당해 유배되고 창왕을 고려시대 요승이었던 신돈의 핏줄이라는 이유로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옹립하게 됩니다. 이후 공양왕 또한 폐위시키고 자신이 고려의 왕위를 이어받고, 이씨 왕조로 새롭게 하기 위해 국호를 조선이라 칭하며 개국하게 됩니다. 조선은 처음 명에 인정받지 못했으나 이후 명과의 관계가 개선되며 인정받게 됩니다.이 모든 과정을 볼 때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 정말 나라를 아끼는 마음에서 전쟁을 반대하기 위해 하였던 것인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안위와 정도전과 공모한 쿠테타의 적절한 시기라고 판단하고 명분을 얻어 추진한 것인가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Q. 거란이 멸망한 후 부족 일부가 고려에 정착하여 백정ㆍ갖바치 등의 직업을 가졌었다는 데 그 기록 등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시대에 거란 유민들이 고려의 영토에서 함께 모여 살던 생활구역을 거란장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거란 멸망 전부터 있었는데 초기의 거란장은 고려와 거란 간의 전쟁 시 포로가 되거나 투항을 하거나 하였던 사람들에게 주어진 일종의 혜택으로 한 곳에 모여 살게 하기는 하였으나, 고려의 군사력 강화를 위해 훈련을 받게 하거나 고려의 문화를 가르쳐 고려의 국민으로서 존중해주었습니다. 거란에서 신분이 높았던 이들은 고려의 왕실과도 친분을 가졌으며 경작할 땅도 내어주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삼국사기를 저술한 김부식이 거란 출신입니다. 두번째로 거란장이 생긴 것은 요나라가 멸망하고 그 유민들이 금나라에 대항해 광복운동을 하였는데 잘 되지 않았습니다. 이후 몽고가 부흥하고 몽고에 쫓겨 고려로 남하했다가 몽고와 고려군에 협공을 당해 고려의 적으로 참수되거나 포로로 잡혀들어왔습니다. 이때 일부는 고려의 백성으로 스며들었으나 거란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저항하는 세력이 있었는데 거란 유민의 지도자였던 양수척이라는 인물은 당시 군부 권력자였던 최충헌과 대립하였고, 자신들의 광복을 위해 고려가 아닌 몽고에게 협력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거란장이 생긴 것은 1219년 고려 고종 6년 거란 유민들의 저항이 끝나고, 몽고 장수 합진도 거란의 부녀자들 700명과 고려의 포로 200명을 돌려주었습니다. 나머지는 자신들의 영토로 데려가 서루지방에 살게 하였다 합니다. 고려도 거란의 부녀자들을 놀고 있는 넓은 땅에 경작할 토지를 주며 모여 살게 하였는데 이 때 대우는 천인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이러한 역사를 볼 때 초기의 거란장의 거란인들은 대진국 발해의 멸망 이후 발해계 거란인들로 같은 민족이라 생각하여 친고려적 성향이 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하여 고려 조정에서도 같은 동포로서 대우하였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하지만 거란 멸망 이후 거란장에 모여 사는 거란인들은 대부분 고려와의 전쟁에서 발생한 전쟁 포로가 많았기 때문에 반고려적 성향이 두드러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하여 고려 조정에서도 인륜적으로 땅을 내어 주어 모여 살게는 하였으나 지속하여 고려에 반항하니 좋은 신분으로 상승하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 시기의 거란인들의 경우 당시 신분사회에서 천한 직업을 가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거란인들 뿐만 아니라 고려에 정착해서 살던 이민족들 중 유목민인 거란, 몽골인이나 수렵인인 여진족이 농경보다는 사냥, 도축 등이 익숙하였기에 자연스럽게 잘하는 것을 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 문헌으로는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이 있고, 이를 연구한 서적으로 고려시대사(1961, 김상기 동국문화사), 고려내투내왕거란인(한규철, 한국사연구 47, 1984)가 있습니다.
Q. 왕건의 부인 신분들은 지방호족들이 많았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약해진 신라, 후백제의 견훤, 후고구려(태봉국)의 궁예가 대립하였던 후삼국시대, 그리고 궁예를 숙청하고 왕의 자리에 오른 왕건이 결국 다시 삼한을 통일하여 우리 한민족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인 통일제국 고려가 세워집니다. 하지만 당시는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가 아니었고, 각 지방의 호족들이 지역 영주로서 지방을 다스리는 자치 형태였다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왕권이 강하지 않았고, 수도에서 국가를 운영하더라도 지방의 호족들이 왕에 반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되면 지속적으로 전란이 일어나 안정을 꾀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에 왕건은 고려의 태조가 된 후 각 지방의 호족의 딸과 혼인하여 인척 관계로 만들어서 왕조의 지지세력을 넓히고 강화하고자 하는 정치적인 선택을 한 것입니다. 당시의 지방호족들은 원래 신라가 고구려, 백제 멸망 이후 신라에 충성했었던 세력이었으나 신라의 왕권과 국력이 약해지면서 배신하여 후백제 또는 후고구려에 붙었던 세력들이므로 고려가 통일했으나 이후 고려의 왕권도 약해지게 되면 언젠가는 반기를 들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태조인 왕건은 이후 안정된 국가 운영과 왕권 강화를 위해 많은 지방의 호족의 딸들과 혼인을 하였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