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이 멸망한 후 부족 일부가 고려에 정착하여 백정ㆍ갖바치 등의 직업을 가졌었다는 데 그 기록 등이 있나요?
고려와 거란간 사극이 방영되는 데거란이 멸망한 후 부족 일부가 고려에 정착하여 백정ㆍ갖바치 등의 직업을 가졌었다는 데 그 기록 등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사>열전 [최충헌 조]에 의하면 옮겨 다니며 사는 곳이 일정치 않아 사냥을 일삼고 유기를 만들어 팔아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을 '양수척'이라고 했는데, 이 양수척이 바로
그 수만 명 거란인의 후예들이며 거란의 후예인 양수척은 농업 중심의 고려 사회에 정착한 뒤에도 농경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유목민족 본래의 생활방식 그대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 생계를 이어가다 이후 '화척'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이들은 주로 소나 말의 도축, 유기 및 가죽 제품 제조 등을 직업으로 삼았다고합니다. 이들이 바로 조선시대 '백정'의 전신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시대 남경 즉 현재의 서울은 여요전쟁 때 항복한 포로를 수용하던 곳이 있었습니다. 왕이 남경을 방문했을 때 왕을 맞이하는 거란인들이 거란 가무를 추고 거란 악기를 연주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려도경에 따르면 거란 포로들 10명 중 1명은 기술자들이었는데 고려 조정은 이들을 옷과 그릇을 만드는 일에 종사케하여 고려의 제조 기술이 보다 정교해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시대에 거란 유민들이 고려의 영토에서 함께 모여 살던 생활구역을 거란장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거란 멸망 전부터 있었는데 초기의 거란장은 고려와 거란 간의 전쟁 시 포로가 되거나 투항을 하거나 하였던 사람들에게 주어진 일종의 혜택으로 한 곳에 모여 살게 하기는 하였으나, 고려의 군사력 강화를 위해 훈련을 받게 하거나 고려의 문화를 가르쳐 고려의 국민으로서 존중해주었습니다. 거란에서 신분이 높았던 이들은 고려의 왕실과도 친분을 가졌으며 경작할 땅도 내어주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삼국사기를 저술한 김부식이 거란 출신입니다.
두번째로 거란장이 생긴 것은 요나라가 멸망하고 그 유민들이 금나라에 대항해 광복운동을 하였는데 잘 되지 않았습니다. 이후 몽고가 부흥하고 몽고에 쫓겨 고려로 남하했다가 몽고와 고려군에 협공을 당해 고려의 적으로 참수되거나 포로로 잡혀들어왔습니다. 이때 일부는 고려의 백성으로 스며들었으나 거란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저항하는 세력이 있었는데 거란 유민의 지도자였던 양수척이라는 인물은 당시 군부 권력자였던 최충헌과 대립하였고, 자신들의 광복을 위해 고려가 아닌 몽고에게 협력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거란장이 생긴 것은 1219년 고려 고종 6년 거란 유민들의 저항이 끝나고, 몽고 장수 합진도 거란의 부녀자들 700명과 고려의 포로 200명을 돌려주었습니다. 나머지는 자신들의 영토로 데려가 서루지방에 살게 하였다 합니다. 고려도 거란의 부녀자들을 놀고 있는 넓은 땅에 경작할 토지를 주며 모여 살게 하였는데 이 때 대우는 천인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이러한 역사를 볼 때 초기의 거란장의 거란인들은 대진국 발해의 멸망 이후 발해계 거란인들로 같은 민족이라 생각하여 친고려적 성향이 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하여 고려 조정에서도 같은 동포로서 대우하였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하지만 거란 멸망 이후 거란장에 모여 사는 거란인들은 대부분 고려와의 전쟁에서 발생한 전쟁 포로가 많았기 때문에 반고려적 성향이 두드러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하여 고려 조정에서도 인륜적으로 땅을 내어 주어 모여 살게는 하였으나 지속하여 고려에 반항하니 좋은 신분으로 상승하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 시기의 거란인들의 경우 당시 신분사회에서 천한 직업을 가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거란인들 뿐만 아니라 고려에 정착해서 살던 이민족들 중 유목민인 거란, 몽골인이나 수렵인인 여진족이 농경보다는 사냥, 도축 등이 익숙하였기에 자연스럽게 잘하는 것을 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 문헌으로는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이 있고, 이를 연구한 서적으로 고려시대사(1961, 김상기 동국문화사), 고려내투내왕거란인(한규철, 한국사연구 47, 1984)가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기록이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공신 충신 등 왕가에 공을 세운 사람이 아니면 기록을 남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기에 적대국의 사람의 기록을 남기지는 않을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