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의 제사문화는 언제 우리나라에 정착하였나요?
고인의 제사를 지내는 풍습은 사실 중국의 문화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런 문화가 언제 어떤 과정으로 우리나라에 전해져서 정착되었는지 궁금합니다. 혹시 아시는 분은 답변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국의 전통적인 제사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한자 문화권 바탕에 한반도의 지역적 특성이 섞여서 형성된 것입니다. 고대 중국 상나라(은나라)의 왕 조갑이 주변 토착신을 배제하고 조갑의 직계 조상만 섬기는 조상신 풍습을 만들게 되는데, 이러한 조상을 섬기는 문화에서부터 제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후 떠돌이 생활을 하며 왕들을 가르치던 공자가 상나라 제사 문화를 재정비했습니다.
이런 제사는 중, 근세에 이르러 유교와 결합하여 조상숭배의 제도로 고착되었습니다. 또한 종교적 의미를 가지면서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합니다. 정교가 분리된 이후에도 황제는 하늘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며, 자신의 조상을 신격화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권위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습니다.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국의 전통적인 제사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한자 문화권 바탕에 한반도의 지역적 특성이 섞여 형성된 것으로 고대 중국 상나라의 왕 조갑이 주변 토착신을 배제하고 조갑의 직계 조상만 섬기는 조상신 풍습을 만들게 되는데 이러한 조상을 섬기는 문화에서부터 제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제사는 근세에 이르러 유교와 결합하여 조상숭배의 제도로 고착되었습니다.
국가 형태가 완비된 후 사직과 종묘, 원구, 방택, 농업, 잠업 등 국가 경영과 관련있는 제례가 갖추어졌고 조상 숭배 사상과 함께 보편화 되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예서(禮書)에 의하면 ‘제왕(帝王)은 하늘을 제사지내고 제후(諸侯)는 산천을 제사지내며, 사대부(士大夫)는 조상을 제사지낸다.’고 했다. 이것은 온 세상을 다스리는 제왕에게는 천지(天地)가 절대자이고, 한 지역을 다스리는 제후에게는 산천(山川)이 절대자이며, 그렇지 않은 사인(私人)에게 있어서의 절대자는 조상(祖上)이라는 데에 연유한다.
인간이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까닭은 효(孝)를 계속하기 위함이며, 효란 자기존재에 대한 보답이다. 그래서 제의례를 근본에 보답하는 의례라는 뜻으로 보본의식(報本儀式)이라 한다. 효는 자기존재에 대한 보답(報答)이기 때문에 인간의 온갖 행실(行實) 중에서도 가장 근원(根源)에 대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모심을 극진히 한다.
이렇게 “살아 계신 조상은 극진히 받들면서 그 조상이 돌아가셨다고 잊어 버려 박하게 한다면 심히 옳지 못한 일이다.”라고 옛 현인(賢人)들은 말하고 있다. 진실로 자기존재를 고맙게 여기는 사람은 “돌아가신 조상 섬기기를 살아 계신 조상 모시듯”(사사여사생(事死如事生))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은 조상을 섬기는 제의례를 일러 “효를 계속하는 것”이라고 한다. 효는 조상이 살아계신 동안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계속 해야 하는 것이다.
예(禮)를 모든 것의 근본으로 하는 성리학(性理學)에 바탕을 둔 《주자가례》는 조선왕조 오백 년 동안 우리의 조상숭배(祖上崇拜) 사상을 보편화시키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고, 가신(家神) 신앙으로 승화되어 백성들의 사고 구조에까지 그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의식 절차가 지나치게 까다롭고 복합하여 후손들이 진실한 공경심(恭敬心)보다는 형식(形式)에 치우쳐서 가산(家産)을 탕진(蕩盡)하는 허례허식(虛禮墟飾)의 폐를 낳기도 하였다. 예의 근본에 대한 제자의 질문을 받은 공자는 ‘호화로움보다는 차라리 검소(儉素)함이 낫다.’고 하였다. 또한 주자도 ‘검소함과 슬픔과 공경하는 마음에 바탕을 두어 예를 표하여야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형편에 따르되, 진실한 공경심으로 정성껏 지내야 한다.
제례는 본디 조상에 대한 숭앙심(崇仰心)과 추모(追慕)에 뜻이 있으나, 요즘 일부에서는 나의 근본인 조상에 대한 최소한의 도의심마저 고갈(枯渴)되어 가고, 기껏 일 년에 한 번 돌아오는 기일(忌日)마저도 명분도 우러나지 않을 정도로 타락되어 가고 있다. 건전한 조상의 혈통을 이어 받았기 때문에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므로 누구라도 조상의 은혜에 성심으로 감사할 줄 아는 진정한 추모의 정을 지녀야 한다. 이는 금수(禽獸)가 아닌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라면 결코 양심을 속이거나 망각(妄覺)해서는 안 될 진리인 것이다.
제사의 근원은 먼 옛날에 천재지변(天災地變), 질병(疾病), 맹수(猛獸)의 공격을 막기 위한 수단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근세에 와서는 유교사상으로 조상에 대한 존경과 애모의 표시로 변하게 되어 가장마다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그러나 봉사대상은 시대에 따라 변천되어 왔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공민왕 2년에 포은 정몽주 선생이 제정한 제례규정에는 대부 이상의 관원은 삼대 봉사(三代奉祀)로 하고 6품 이하의 신문을 가진 사람은 이대봉사이고, 7품 이하의 하급관원과 서민들은 부모제사만 지내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 후 조선시대 경국대전 예전편에 기록된 제례의 봉사대상을 보면 사대부 이상은 사대봉사, 6품 이상은 삼대봉사, 7품 이하는 이대봉사 일반서인(一般庶人)은 부모제사만 지내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그 당시 7품 이상의 관원은 불과 20% 미만으로 일반국민의 80% 상당의 인원이 7품 이하의 관원이나 서인이었기 때문에 전 국민 중 대부분이 부모제사만 지낸 셈이다. 그러하던 것이 한말 갑오경장(고종 21년) 이후로 구시대의 계급사회가 무너지자 반상의 구별없이 사대부의 예절을 따라 사대봉사를 해왔던 것이다.
출처 : 글로벌시대의 음식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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