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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오깨무르프423
모리오깨무르프42323.08.19

명나라는 후금에 어떻게 굴복하게 되었나요?

임진왜란때 우리와 힘을 합쳐 왜적들을 물리치는데 일조를 했던 명나라인데요. 이러한 강력했던 명나라가 훗날 후금에 결국 잡아먹히게 되는데 어떻게 변방의 오랑캐로 여겨졌던 후금이 명나라를 굴복시키게 된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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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후금의 인구와 경제력은 원래 조선보다 약했습니다

    명나라의 황제와 신하들이 부패한 덕에 후금이 이긴 걸로 봅니다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명나라는 내부적으로 매우 부패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무너지면서 후금에 굴복하게 됐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환관의 정치 간여로 역대의 황제는 정치에 흥미를 잃었으며, 중엽 이후 황실의 사치, 특히 명 중기 이후 과도한 토지 집중, 부역의 번잡함 때문에 생활이 갈수록 어려웠다. 여기에 소작인의 지주에 대한 부담도 갈수록 늘어났다. 때문에 이미 정통 연간에 섭종유(葉宗留)와 등무칠(鄧茂七)의 반란을 비롯하여, 성화 연간에 유통(劉通)·이원(李原)의 반란이 일어나고, 정덕 연간에는 유육(劉六)·양호(楊虎)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러한 사회적 혼란을 바로잡기 위하여 장거정의 개혁이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고 환관들의 정치 간여는 여전하였다.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출병하여 재정적 지출이 커졌으며, 또 이후에 동북 지방에서 일어난 여진족에 대항하기 위하여〔요향(遼餉)〕, 각지의 민란(변)을 평정하기 위하여〔초향(剿餉)〕, 군대를 훈련시키기 위하여〔연향(練餉)〕, 이른바 '삼향(三餉)'을 징수함으로써 재정의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백성의 부담은 날로 늘어났다.


    명 말기의 민란은 섬서에서 시작되었다. 천계(天啓) 7년(1627)에 왕이(王二)가 징성(澄城)·지현·장두요(張斗耀)를 죽이면서 시작되었는데, 이후 고영상(高迎祥)·이자성(李自成)·장헌충(張獻忠) 등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군대의 도망병, 반란을 일으킨 변병(變兵), 파직된 역졸(驛卒), 기민(飢民) 등의 유민으로 '유구(流寇)' 또는 '유적(流賊)'이라고 불렀다. 이들의 활동은 처음에 섬서와 산서 일부로 한정되었고 명확한 정치 목표도 없었으나, 숭정(崇禎) 6년(1633)부터 하남·호광(호남 호북)·남직예·사천 등으로 활동 구역이 확대되었다.


    이 가운데 틈왕(闖王) 고영상의 세력이 제일 컸다. 그러나 숭정(崇楨) 9년(1636)에 고영상은 포로가 되어 살해되고, 이자성이 틈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런데 명군의 진압이 확대되자 이자성은 패하고 장헌충은 위장으로 투항하여 잠시 잠잠해졌다. 숭정 12년에 장헌충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고, 이자성도 재기하여 반란 세력이 다시 확대되었다. 특히, 이자성은 숭정 14년에 하남 낙양으로 들어가 그 세력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한편, 장헌충은 사천으로 들어갔다가 동쪽을 향해 호광으로 진입하였다.


    장헌충은 숭정 16년(1643)에 호북 황주(黃州, 황강)를 점령하고 스스로 서왕(西王)이라고 칭하면서 한양과 무창을 연달아 함락하였다. 그리고 대서왕(大西王)이라 칭하면서 관제를 정하여 약 30여 개의 주·현을 지배하였다. 그런데 명군이 대대적으로 무창을 공격하자 장헌충은 이 곳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도망, 숭정 17년에 사천으로 들어가 성도를 점령하고 국호를 대서(大西), 연호를 대순(大順)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관제를 정비하였으며, 대순통보를 주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가 비록 정부를 세웠다 해도 유구의 탈을 벗지 못하였다. 결국 2년도 안 되어 청군에 의하여 장헌충은 포로가 되고, 대서도 와해되었다.


    한편, 숭정 16년에 이자성도 형양(荊襄)을 근거지로 양양(襄陽)을 양경으로 고쳐 정권을 수립하고, 신순왕(新順王)이라고 칭하였다. 다음 해 장안을 서경으로 고치고 국호를 대순(大順)이라고 하였다. 그 해 2월에 이자성은 장안을 출발하여 황하를 건너 산서로 들어가 태원·대동·하북 선부(宣府)를 경유, 거용관(居庸關)으로 들어와 명(明) 12릉(陵)의 향전(享殿)을 불태워 파괴하고 3월 17일에 북경으로 들어갔다. 결국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19일에 매산(媒山, 경산)에서 자살하여 명은 멸망하였다. 그러나 이자성도 청군의 공격을 받아 북경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결국 청군의 추격을 받아 구궁산(九宮山, 호북 통성)에서 향민에게 살해되었다.

    출처 : 중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