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왕실의 외척으로 문벌 귀족에 가깝습니다.
염상(廉相)·박수문(朴守文)과 함께 태조의 임종을 곁에서 지킨 세 재신 중의 한 사람으로서, 태조가 죽자 유명(遺命)을 내외에 선포하는 중책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태조 때에는 태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혜종이 즉위한 뒤에는 왕권에 도전하는 가장 강력한 적대세력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한편 혜종의 이복동생인 왕요(王堯: 뒤의 정종)도 서경(西京)의 왕식렴(王式廉) 세력과 결탁, 몰래 모반을 도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왕규와 왕요 사이에 암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때 혜종은 왕권이 미약해 왕위쟁탈 음모에 강력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신변보호에만 급급했습니다.
왕규는 자기의 외손자 광주원군을 왕위에 앉히려고 몇 차례 혜종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한 번은 혜종이 밤중에 잠든 틈을 타서 몰래 심복을 보내 암살을 시도했으나, 도리어 잠에서 깬 혜종의 주먹에 맞아 죽음으로써 실패하였습니다.
한 번은 왕규가 직접 밤에 심복들을 거느리고 신덕전(神德殿)으로 쳐들어갔으나, 혜종이 이미 최지몽(崔知夢)의 건의에 따라 침소를 중광전(重光殿)으로 옮긴 뒤여서 역시 실패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정국이 어수선해지자, 왕요는 서경에 있던 왕식렴의 군대를 수도로 불러들여 왕위를 차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 왕규를 붙잡아 갑곶(甲串)에 귀양을 보냈다가 사람을 보내어 죽이고, 아울러 그의 일당 300여 명도 처형하였습니다.
그 결과 왕규에 의한 왕위쟁탈음모는 종식되었으나, 그 사건에 대한 역사적 의미는 학자에 따라 해석이 다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