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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달한거북이38
활달한거북이3823.07.27

조선시대에 북벌 운동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과거 우리 조상의 큰 북벌 중에 하나가 고구려 시대

광개토대왕 때 중국 쪽에 북벌운동을 해서

넓은 영토를 차지 했었는데요~!

그렇다면 조선시대에 북벌 운동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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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8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27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17대 왕 효종은

    효종은 강력한 북벌 의지를 표명하였지만 실제로 군사력은 공격용이 아닌 방어용으로 정비되었으며,

    개혁은 내실을 다지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북벌 운동은 오랑캐의 나라를 섬겨야 하는 현실 속에서 조선 사회가 자존심을 회복하면서 국가 기강을 다잡기 위한 방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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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조사를 해본 결과 조선시대에도 북벌 운동이 있었습니다. 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북벌 운동을 추진했지만, 명나라의 방해로 실패했습니다.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지만, 그 후에도 북벌 운동을 계속했습니다. 조선의 북벌 운동은 고종 때까지 이어졌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조선의 북벌 운동은 실패했지만, 민족의 자주성과 독립을 위한 의지를 보여준 중요한 사건입니다. 조선의 북벌 운동은 오늘날에도 우리 민족에게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참고 하셔서 도움되셨다면 추천 좋아요 부탁드려요~ 좋은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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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북벌론을 추진한 왕이 효종입니다. 효종은 북벌을 주장하고 실천해왔으나 청나라의 요청으로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 나선정벌에 두 차례나 출정하여 큰 공을 세웠으나 호종이 죽고난 뒤에는 북벌론이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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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북벌운동 추진만 했을뿐입니다

    아래 17세기 한반도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전장이 되어, 조선 정부는 전쟁 이후 피폐해진 백성의 생활과 실추된 국가 체제를 정비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특히 병자호란은 오랑캐인 청나라에게 패배했다는 이유로 조선 지식인의 정신적 충격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굴욕적인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로 항복한 조선은 청나라에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후 인조(仁祖, 재위 1623~1649)의 두 아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다. 소현세자가 심양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의문의 죽음을 맞았고, 뒤이어 봉림대군이 즉위했습니다


    1649년(효종 즉위)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하면서 오랑캐인 청나라를 정벌하자는 북벌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때까지도 강남 지역에는 남명(南明) 정권이 존속하고 있었고, 청나라는 아직 체제가 완전히 정비되지 못하였습니다.


    효종은 반청척화파(反淸斥和派)를 요직에 배치하여 어영청⋅수어청⋅훈련도감의 군사력을 강화하였고, 대동법 실시를 확대하는 등 경제 개혁에도 박차를 가했다. 효종은 복수설치(復讐雪恥)⋅춘추의리(春秋義理) 등을 강조하는 송시열(宋時烈)을 등용하여 북벌의 추진력을 강화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송시열은 직접적인 정벌이 아니라 정사(政事)를 바르게 함으로써 오랑캐에 대응하자는 논리를 폄으로써 북벌 정책은 실제로는 전란 이후 무너진 국가의 재정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북벌 운동을 통해 효종은 부왕 인조가 잃어버린 국왕의 위엄을 되찾고자 하였으며,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 산림들은 출사의 명분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1659년(효종 10) 효종의 죽음과 1662년(현종 3) 남명 정권이 붕괴하면서 북벌 운동은 실질적인 동력을 잃었습니다.

    라는 답변을 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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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조유성 AFPK입니다.

    ✅️ 네, 조선 효종 때 효종의 주도로 북벌론이 대두되었으나, 효종이 급작스럽게 사망하고, 북벌을 적극 지지하던 윤휴 등도 세력을 잃어 버림에 따라 북벌이 실제로 실현되지는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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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북벌은 조선의 제17대 국왕인 효종(孝宗)의 대중국(對中國) 노선이다. 인조[조선](仁祖)의 둘째아들이자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동생인 봉림대군은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치욕을 겪은 후 청에 끌려가 8년간 인질생활을 거쳐 효종으로 즉위하였는데 이때 ‘대청 복수(對淸 復讐)’의 북벌론을 주창하였다. 당시 집권 서인들은 ‘대명 의리(對明 義理)’의 입장에서 북벌론을 이해, 이로써 북벌론은 ‘대청 복수’와 ‘대명 의리’의 양 측면을 보이게 되었다. 효종 사후 서인(西人)들이 북벌론을 파기하면서 남인(南人)의 당론으로 이어지다가 현종 말·숙종 초 이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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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조형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도 북벌 운동이 있었습니다. 효종 시기 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 등의 수치를 씻고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켜 대신 복수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청나라가 중원을 장악했었는데, 명나라가 회복할 것으로 생각하고 나온 정치적 담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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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효종대에 국가를 재정비하여 청나라를 정벌하려는 운동이 있었습니다.

    조선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게 패배했다는 이유로 굴욕적인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해야 했었는데요.

    이후에는 인조의 두 아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소현세자는 조선에 돌아온지 얼마되지 않아 의문의 죽음을 맞고, 봉림대군이 즉위 하게 되었는데, 이 봉림대군이 효종입니다.

    효종은 즉위후 청나라를 정벌하자는 북벌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효종은 반청척화파(反淸斥和派)를 요직에 배치하여 군사력을 강화하였고, 대동법 실시를 확대하는 등 경제 개혁에도 박차를 가며 동시에 송시열(宋時烈)을 등용하여 북벌의 추진력을 강화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군사력은 공격이 아닌 방어용으로 정비되며 개혁은 내실을 다시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결국 청나라를 섬길 수 밖에없는 현실에서 조선이 자존심을 회복하며 국가 기강을 다잡기 위한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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