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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빙
비비빙23.06.26

김시습이라는 사람은 어떤인물이었나요?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보던중에 김시습이라는사람에 이름이 많이 나오는데 김시습이라는 인물에 대한 내용과 업적은 어떤것이 있는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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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26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시습은 조선전기 매월당집·금오신화·만복사저포기 등을 저술한 학자이자 문인입니다.

    1435년(세종 17)에 태어나 1493년(성종 24)에 사망했다. 5세 신동이라 불릴 정도로 어릴 때부터 글재주가 뛰어났다고 합니다.
    21세 때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3일간 통곡하다 보던 책을 불사른 뒤 승려가 되었다. 생육신으로서 단종에 대한 절개를 끝까지 지키며 유랑인의 삶을 살다 충남 부여의 무량사에서 생을 마쳤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는 근본사상은 유교에 두고 불교적 사색을 병행했으며, 선가의 교리까지 포괄하려고 시도하는 등 다채로운 면모를 보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시습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의 작가입니다.

    세조에게 밀려난 단종에 대한 신의를 끝까지 지키며 입신하지 않고 자연에 은거한 생육신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그렇게 초야에 묻혀 살아가는 떠돌이의 삶이었지만 학문을 실천에 옮기는 지식인의 의무를 철저하게 이행하였고, 율곡 이이로부터 백세의 스승이라는 칭송을 들을 정도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인물 소개

    1. 출생연도/사망연도 : 1435년 - 1493년

    2. 직업 : 조선 초기의 문인

    3. 생애

    삼각산 중흥사에서 독서를 하다 세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3일 동안 문을 듣고 번민한 끝에 통곡을 하고 책을 불살랐다고 알려져 있다. 머리를 깎고 21세에 방랑에 길에 들어서 전국을 유랑하였으며 31세에 경주 금오산에 도착하였다. 59세에 홍성의 절에서 입적했다.

    4. 저서 : 금오신화

    시대적 배경

    김시습이 살았던 시대에는

    조선 제 6대왕 단종이 있을 때의 시기입니다.

    단종의 삼촌 수양대군은 어린 단종의 왕위를 빼앗고 자신이 왕이 됩니다.

    그리고 단종은 유배를 보내죠.

    단종의 복위운동을 위해 활약한 사육신과 생육신 중에 김시습이 있었습니다.

    업적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세조의 왕위찬탈에 불만을 품고 승려로 생활하며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존경해야할 이유

    옳지 못한 방법으로 왕이 된 세조에게 아부하지 않고

    끝가지 단종에 대한 충성을 지킨 점 때문에 존경해야 한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시습의 생애를 알려주는 자료로는 『매월당집』에 전하는 「상류양양진정서(上柳襄陽陳情書)」, 윤춘년(尹春年)의 전기(傳記), 이이의 전기, 이자(李耔)의 서문(序文), 『장릉지(莊陵誌)』 · 『해동명신록』 · 『연려실기술』 등이 있다.


    김시습은 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났다. 1437년(세종 19) 3살 때부터 외조부로부터 글자를 배우기 시작하여 한시를 지을 줄 아는 천재였다. 『정속(正俗)』, 『유학자설(幼學字說)』, 『소학(小學)』을 배운 후 5세 때 이미 시를 지을 줄 알아 그가 신동(神童)이라는 소문이 당시의 국왕인 세종에게까지 알려졌다. 세종이 승지를 시켜 시험을 해보고는 장차 크게 쓸 재목이니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하고 선물을 내렸다고 하여 ‘오세(五歲, 5세)’라는 별호를 얻게 되었다.


    5세인 1439년(세종 21)에는 이웃집에 살고 있던 예문관 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으로부터 『중용』과 『대학』을 배웠고, 이후 13세인 1447년(세종 29)까지 이웃집의 성균관 대사성 김반(金泮)에게서 『맹자』 · 『시경』 · 『서경』을 배웠고, 겸 사성 윤상(尹祥)에게서 『주역』 · 『예기』를 배웠고, 여러 역사책과 제자백가서는 스스로 읽어서 공부했다.


    1449년(세종 31)에는 어머니 장씨를 여의자 15세의 나이로 외가의 농장 곁에 있는 어머니의 무덤 옆에서 여막을 짓고 3년상을 치렀다. 그러나 3년상이 끝나기도 전에 그를 어머니처럼 돌보아주던 외숙모가 별세하였고, 당시 아버지는 계모를 맞아들였으나 병을 앓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무렵 그는 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원만한 가정이 되지 못하였다. 어머니의 죽음은 인간의 무상함을 깨닫게 하였고, 18세에 송광사에서 선정에 드는 불교 수행에 입문하였다. 그 후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로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였다.


    21세 때인 1455년(세조 1)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의 왕위찬탈( 계유정난(癸酉靖難)) 소식을 듣고, 철원에 은거하였으며 「자규사(子規詞)」를 지어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규탄하고 단종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김시습은 이후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산사를 떠나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다. 사육신이 처형되던 날 밤 온 장안 사람들이 세조의 전제에 벌벌 떨고 있을 때에 거리에서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진 사육신의 시신을 바랑에 주섬주섬 담아다가 노량진 가에 임시 매장한 사람이 바로 김시습이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이후 그는 관서지방을 유람하며 역사의 고적을 찾고 산천을 보면서 많은 시를 지었다. 이는 『매월당집』에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으로 남아 있다.


    그가 쓴 발문에서 방랑을 시작한 동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질탕(跌宕)주1하여 명리(名利)를 즐겨하지 않고 생업을 돌보지 아니하여, 다만 청빈하게 뜻을 지키는 것이 포부였다. 본디 산수를 찾아 방랑하고자 하여, 좋은 경치를 만나면 이를 시로 읊조리며 즐기면서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하였지만, 문장으로 관직에 오르기를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세조의 왕위찬탈)을 만나 남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도(道)를 행할 수 있는데도 출사하지 않음은 부끄러운 일이며, 도를 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홀로 그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고 적었다.


    26세 때인 1460년(세조 6)에는 관동지방을 유람하여 지은 시를 모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을 엮었고, 29세인 1463년(세조 9) 때에는 호남지방을 유람하여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을 엮었다. 그 해 가을 서울에 책을 구하러 갔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유로 세조의 불경언해사업(佛經諺解事業)에 참가하여, 교정(校正)하는 일을 맡아 열흘간 내불당에 거쳐한 일이 있었다. 1465년(세조 11) 원각사 낙성식에 불려졌으나 짐짓 뒷간에 빠져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평소에 경멸하던 정창손(鄭昌孫)이 영의정이고, 김수온(金守溫)이 공조 판서로 봉직하고 있는 현실에 불만을 품고 31세 때인 1465년(세조 11) 봄에 경주로 내려가 경주의 남산인 금오산(金鰲山)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칩거하였다. 이때 매월당이란 호를 사용하였다. 이곳에서 31세(1465) 때부터 37세(1471)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불리는 『금오신화』를 비롯한 시편들을 지어 『유금오록(遊金鰲錄)』에 남겼다.


    그동안 세조와 예종이 죽고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1471년(성종 2) 37세에 서울로 올라와 이듬해 성동(城東) 폭천정사(瀑泉精舍), 수락산 수락정사(水落精舍) 등지에서 10여 년을 생활하였으나 자세한 것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1481년(성종 12) 47세에 돌연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아들여 환속하는 듯하였으나, 이듬해 폐비윤씨사건(廢妃尹氏事件)이 일어나자, 다시 관동지방 등지로 방랑의 길에 나섰다. 당시 양양 부사(襄陽府使)였던 유자한(柳自漢)과 교분이 깊어 서신왕래가 많았으며,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강릉 · 양양 · 설악 등지를 두루 여행하였다.


    육경(六經)과 자사(子史)의 글로 지방청년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시와 문장을 벗삼아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는데, 『관동일록(關東日錄)』에 있는 100여 편의 시들은 이 기간에 쓰여진 것이다. 10대에는 학업에 전념하였고, 20대에 산천과 벗하며 천하를 돌아다녔으며, 30대에는 고독한 영혼을 이끌고 정사수도(靜思修道)로 인생의 터전을 닦았고, 40대에는 더럽고 가증스러운 현실을 냉철히 비판하고 행동으로 항거하다가 50대에 이르러서는 초연히 낡은 허울을 벗어 버리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충청도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였다.


    이곳에서 1493년(성종 24) 59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유해는 불교식으로 다비(茶毗)를 하여 유골을 모아 그 절에 부도(浮圖)로 안치하였다. 그는 생시에 이미 자기의 초상화인 노 · 소(老少) 2상(二像)을 손수 그리고 스스로 찬(贊)까지 붙여 절에 남겨두었다고 하나, 현재는 『매월당집』(신활자본)에 「동봉자화진상(東峯自畫眞像)」이 인쇄되어 전한다.


    작은 키에 뚱뚱한 편이었고 성격이 괴팍하고 날카로워 세상 사람들로부터 광인처럼 여겨지기도 하였으나 배운 바를 실천으로 옮긴 지성인이었다. 이이(李珥)는 '백세의 스승'이라고 칭찬하기도 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김시습을 비롯한 이맹전(李孟專) · 조여(趙旅) · 원호(元昊) · 성담수(成聃壽) · 남효온(南孝溫)의 절개를 칭송하여 생육신(生六臣)이라 부른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세종-세조-성종때의 인물로 생육신 중의 한명입니다.

    어려서 부터 영특하여, 5살때 세종으로 부터 비단을 하사 받은 영재였다고 합니다.

    21세때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 내고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히 여겨 공부하던 모든 책을 불태우고 머리를 까고 스님이 되었습니다.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사육신이 거열형으로 죽임을 당했을때 아무도 그 시신들을 수습하지 않던것을 김시습이 수습하여 노량진에 매장하였다 기록이 연려실기술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승려가 되어 전국을 돌아 다니다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을 짓고 입산하여 칩거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집필하였습니다.


    이후 환속하여 살다 부여 무량사에 거쳐를 정하고 살다 병사하였습니다.


    자기의 학문을 개인의 영달을 위해 사용하기 보다 배운 대로 실천하며 산 진실된 학자였다 하겠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본관 강릉, 자 열경, 호 매월당,동봉,청한자,벽산 , 법호 설잠, 시호 청간, 생육신의 한 사람입니다.

    서울 성균관 부근에 있던 사저에서 부친 김일성의 아들로 출생, 신동, 신재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3세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른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라는 시를 읊었으며 5세때 이 소식을 들은 세종에게 불려가 총애를 받았습니다.

    15세 되던 해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에 몸을 의탁하나 3년이 채 못 되어 외숙모도 별세해 다시 상경했을 때 아버지도 중병을 앓고 있었고 이러한 가정적 역경 속에 훈련원 도정 남효레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이어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하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책을 태워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이라 하고 전국으로 방랑의 길을 떠났고 북으로 안시향령, 동으로 금강산과 오대산, 남으로 다도해에 이르기까지 9년간을 방랑하며 탕유관서록 , 탕유관동록, 탕유호남록 등을 정리하여 그 후지를 썼습니다.

    1463년 효령대군의 권유로 잠시 제오의 불경언해 사업을 도와 내불당에서 교정 일을 보았으나 1465년 다시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을 짓고 입산, 2년 후 효령대군의 청으로 잠시 원각사 낙성회에 참가한 일이 있으나 누차 세조의 소명을 받고도 거절, 금오산실에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지었고, 산거백영을 썼습니다.

    이곳에서 6~7년을 보낸 후 다시 상경하여 성동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거백영 후지를 썼고 1481년 환속, 안씨를 아내로 맞이하나 1483년 다시 서울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나섰다가 충남 부여의 무량사에서 사망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시습은 조선전기 『매월당집』·『금오신화』·『만복사저포기』 등을 저술한 학자이자 문인입니다.

    1435년(세종 17)에 태어나 1493년(성종 24)에 사망했으며, 5세 신동이라 불릴 정도로 어릴 때부터 글재주가

    뛰어났습니다. 21세 때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3일간 통곡하다 보던 책을 불사른 뒤 승려가 되어 생육신으로서 단종에 대한 절개를 끝까지 지키며

    유랑인의 삶을 살다 충남 부여의 무량사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