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검색 이미지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굳센때까치29
굳센때까치2923.11.13

서태후는 중국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나요?

서태후가 중국의 정치, 사회, 또는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고 싶습니다. 서태후의 통치 시기에 중국은 어떤 변화를 겪었나요? 그리고 서태후의 정치적 성향이나 정책은 어떠했나요?
55글자 더 채워주세요.
답변의 개수5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태후는 보수적인 성격으로, 무술변법을 실행하며 개혁을 추진하던 광서제를 견제하고 황실의 권력을 독점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광서제는 유폐되었으며, 서태후가 사망한 후에야 복권될 수 있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태후는 보수적인 성향을 가졌으며, 전통적인 유교 사상을 중시하고, 서구 문물 도입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녀의 통치 시기에는 의화단 사건이 일어나 외세의 침략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농민봉기로 인해 8개국 연합군의 침입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청나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는 등의 굴욕을 겪게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2차 아편전쟁 이후 서태후는 공친왕 , 이홍장 등 여러 대신들을 통해 양무운동을 벌여 군사, 무기 정비는 물론 해외 유학생 지원과 서양식 교육제도 정비 등 제국 내 대대적 개혁을 했으나 청일전쟁에 대패하게 되면서 양무운동은 한계가 있음을 지적당했고 청나라는 아시아의 종이호랑이라는 것을 증명하게됩니다.

    이런 현실을 본 광서제는 캉유웨이와 같은 젊은 사상가들을 곁에 두고 이들은 변법자강운동을 통해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일본처럼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을 비롯한 근대적인 개혁을 꿈꾸나 광서제가 자신의 군대를 가지려고 하고 자신의 권력위치까지 흔들려하자 처음에는 그를 지지하던 서태후도 곧 지지를 철회, 변법파는 반발해 서태후를 제거하려했고 위안스카이는 변법파를 배신해 이를 서태후에게 알립니다.

    서태후는 자신을 따르던 청 왕조의 보수파들과 함께 무술정변을 일으켜 광서제를 유폐, 그를 따르던 변법파들을 대거 숙정, 결국 변법자강운동은 100일 천하고 끝납니다.

    그뒤 서태후는 자신을 방해하려는 외세 세력에 반감을 품고 반외세 운동단체인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서태후는 이들을 구슬려 청나라를 부흥시켜 서양 오랑캐들을 몰아내자는 부청멸양으로 구호를 바꾸게 했고,이후 서양 열강들이 자신을 몰아내고 광서제를 복귀시키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선전포고 했다가 헛소문임이 밝혀져 취소, 그나 이미 열강들은 8개국 연합국으로 베이징을 점령했고 서태후는 시안까지 도주하고 불평등조약을 만들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태후는 청나라 말기의 황태후입니다. 청나라 제9대 황제 함풍제의 추존황후이자 제10대 황제 동치제의 어머니이며 제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이자 마지막 황제 선통제의 큰친할머니입니다. 본래 귀인의 칭호를 받은 후궁이었으나 함풍제의 장나민 동치제를 낳으면서 의빈 의비를 거쳐 의귀비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러다 제2차 아편전쟁 이후 함풍제가 붕어하자 자신의 아들인 동치제가 6세의 나이로 즉위하면서 함풍제의 정비인 동태후와 더불어 태후의 자리에 오릅니다. 청나라에서는 후궁의 자식이 황제가 될 경우 태후가 둘이 됩니다. 정실황후는 모후 황태후가 되고 황제의 생모인 후궁은 성모황태후가 됩니다. 함풍제는 죽기 전 8명의 보정대신으로 섭정을 하게 하는데 서태후는 이에 불만을 품고 함풍제의 동생 공친왕과 연합하여 보정대신들을 쫓아내고 자신과 동태후 공친왕 섭정체제를 확립합니다. 결국 글을 모르는 동태후는 뒷전으로 물러났고 공친왕을 견제하면서 서태후는 청나라 1인자의 위치에 올라섰습니다. 무술정변과 의화단 사건 등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데는 성공했으나 철의 여인 서태후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병사하고 맙니다.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태후는 청조 10대 황제인 동치제(1861~75 재위)의 어머니이자 청조 제11대 황제인 광서제(1875~1908 재위)의 양어머니로서 청 제국을 거의 반세기 동안 지배했다. 보수파 부패관료 일당을 기반으로 한 철권통치로 청을 지배함으로써 중국 역사상 강력한 여성 지배자로 꼽힌다. 황제가 죽자 당시 6세이던 재순은 동치제로 즉위했고, 국사는 8명의 원로로 구성된 섭정위원회가 주관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묘한 계략을 세워 그녀와 함풍제의 정실 자안황태후, 전 황제의 동생인 공친왕이 섭정을 넘겨받아 3인집정이 통치했다. 동치제가 성년이 되면서 섭정은 끝났지만 서태후는 계속해서 국사를 장악했다. 동치제가 죽자 군대의 힘을 빌려 3세의 조카를 양자로 삼아 제위를 넘겨주었다. 그 후에도 섭정은 계속되었고 반외세적 성격의 의화단운동을 지원하다가 외세가 청나라에 주둔하는 결과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