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귀향을 보내던 지역은 어떤 기준으로 정해졌나요?
조선시대 역대 역사를 보면 커다란 죄를 지은 사람들은 귀향이라는 것을 가게 되는데요. 한양에서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보내더군요. 그럼 이런 귀향지를 선정하는 기준이 있었을까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유배를 보낼 때에도 거리가 정해져 있다고 합니다.
죄질에 따라 궁궐과의 거리가 정해지고 유배장소가 정해진다고 합니다.
조선 시대에는 유형(流刑)이라 하여 3,000~5,000리 사이에서 거리에 차별을 두었습니다. 유배는 대체로 정치범이 받는 형벌로,
어느 경우에나 곤장 100대를 때려서 보내 김범우처럼 유배 생활 중에 숨진 사람도 있습니다. 유배의 종류는 2,000리 밖(약 800km 밖), 3,000리 밖(약 1,200km 밖), 이주, 정배, 무기정배, 원지정배, 절도정배(외딴섬), 절도안치, 가극안치, 위리안치, 본향안치 등이 있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죄의 경중에 따라 2000리, 2500리, 3000리로 나누어 유배를 보냈습니다.
대부분의 귀양지는 사람이 살기 힘들고 험준한 지역을 고르며 함경도의 삼수나 갑산 등 조선의 최북단 지역 혹은 제주도나 흑산도를 비롯해 강화 교동도, 전라남도 완도, 보길도, 추자도, 부산 가덕도, 경상남도 남해도, 거제도 같은 섬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유배에는 중죄인 유배와 정치적 추방의 차이가 있어서 후자는 지방연금의 성격이 강했으며 유배지 선정에서 그 차이가 보이는데 죽어줬으면 싶은 경우엔 험한 바닷길에 죽을 수도 있고 고의로 죽여도 증거가 없는 섬으로 추운 데서 고생 좀 하고 정신 차려서 다시 와라 싶으면 북방 말이 많이 나오니 잠시 쉬다 와라 하고 보내는 곳이 남방 아예 요식행위로 보냈다는 시늉만 하려면 죄인의 본가나 농장같은 근거지로 보내는 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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