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예학에 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주자가례와 3례, 또 3례 중에서도 예기와 의례 중 어느 것을 더 중시하고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학파와 당색에 따른 차이가 드러나면서, 마침내 인조대의 원종추숭 논의나 현종 때의 복제 논쟁과 같은 왕실의 전례에 대한 예법의 적용문제로 비화, 정치세력간의 커다란 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사림이 사회전반을 주도하며 주자가례에 의한 예학이 발달하여 종법제가 정착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시기는 17세기 이후였습니다. 그 결과 가조가 널리 보급되어 사족집안의 가옥구조까지 달라졌으며 남귀여가혼에 대신하여 영친례가 본격화되고 입후제가 확립되는 등 종전의 양계적 특성이 부계적 가족제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주자가례에서 적장자에 의한 사대봉사의 실현을 보게 하였으며 그에 따라 자녀균분상속제 역시 적장자 상속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이런 종법적 가족질서의 확립은 족보에도 영향을 미쳐 17세기 초까지는 외손까지 포함되는 자손보 형태에서 부계친만 수록하며, 기록도 선남후사로 하는 방식을 정착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촌락의 구성에서도 조선 전기까지 몇 세대의 내외손이 함께 거주하는 이성잡거의 동족촌락에서 부계친 중심의 동성촌락으로 바뀌는 변화까지 일으켰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