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에서는 꽤 오랫동안 후손을 차별하지 않는 균분상속이 실질적으로 작동했다과 합니다. 우리가 한때 조선의 전통으로 여겼던 딸보다는 아들, 차남보다는 장남 중심의 상속제도가 자리를 잡은 것은 17세기 이후에나 되어서였다습니다. 이런 변화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우선 장남을 집안의 계승자, 제사 주관자로 확고하게 인정하며 부계 혈통의 영속을 염원했던 종법이 이즈음에 이르러 보편화된 것을 꼽을 수 있습니다. 자식들의 수에 따라 재산을 나누는 균분상속이 집안 경제력의 축소로 이어졌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 같은 문제를 지적한 대표적인 인물이 정약용입니다. 그는 “주요 가문들의 본종(本宗)이 어려움을 겪고 제사도 지내지 못하게 된 배경을 균분 상속”으로 꼽았다고 합니다. 선대의 재산이 막대할 때는 사람 수에 따라 나누는 게 큰 문제가 안되지요. 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시간이 지날수록 상속할 재산이 줄어드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재산을 형성하는 중요한 토대인 관직의 획득도 점점 어려워졌지요. 가령 재령 이씨의 집안은 17세기 들어 이함-이시청-이신일 3대로 이어지는 동안 상속할 수 있는 노비는 161명→88명→50여 명으로, 토지는 821두락→400여 두락으로 줄었다고 하지요.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많지 않은 재산을 자녀들에게 똑같이 나눠주면 모두가 가난해지고 아들들은 제사를 지내기도 어려울 것이라는 걱정을 하는 가문들이 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상속에서 딸을 배제하는 명분이 되었고, 상속 재산의 감소를 막는 방안으로 아들 중심 상속, 나아가 장자 우대 상속으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