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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낙타174
순수한낙타17423.06.20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는 정확히 무엇인가요?

명나라는 황제가 있고 조선은 왕이었습니다.

그럼 조선은 명나라의 속국이었나요?

그건 중국에서 주장하는 내용 아닌가요? 진실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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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선조실록»을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조선 국왕은 위망(危亡)이 조석간에 달려 있는 조선의 사태를 더 이상 지연시킬 수 없어 방어에 관한 긴급 사항을 알리니 귀하께서 일을 담당한 여러 신하들에게 속히 명령을 내려 착실히 기회를 살펴 거행케 함으로써 속국을 보호해 달라는 등의 일로 자문을 띄웁니다."

    «선조실록», 선조 30년 6월 13일 임신 5번째기사​

    보시면 명에 보내는 문서에

    "속국"이란 표현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걸 근현대에 변화한

    속국 개념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속국은 2가지 개념으로 볼 수 있습니다.

    - 중국 중심의 조공책봉질서에 편입된 수직관계

    - 반식민지 상태의 국가

    앞의 개념이 전근대 동아시아의 일반이었고,

    뒤의 개념은 제국주의 시대에 등장한

    변형된 속국 개념입니다.

    * 실제 명은 왜란 때 일본도 명의 속국이라 했음

    따라서 단순히 속국 또는 속방이라 했다 하여

    조선이 중국의 지배를 받는

    반식민지 상태 수준이었다 할 순 없는 겁니다.

    그러한 시도는 1882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체결 이후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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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20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대(事大)란 본래 큰 것을 섬긴다는 뜻이지만, 그 뜻이 바뀌어 대외의존적 성향을 지칭하는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사대주의는 역사적으로 조선시대 말기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 속에서 자기정체성(自己正體性)을 찾으려는 몸부림의 표현이다.


    그리고 원래의 의미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세계질서에서 대중국과의 외교관계의 인식에서 나타나는 한국인의 한 특성을 뜻하는 개념이라고 규정할 수가 있다.


    한국·중국·일본을 포함하는 유교문화권 또는 한자문화권에서 사대의 ‘사(事)’는 ‘섬긴다[奉]’는 좋은 뜻으로 사용되어왔다.


    『효경(孝經)』개종명의장편(開宗明義章篇)에는 “무릇 효는 부모를 섬기는 것이 첫째이고, 임금을 섬기는 것이 다음이고, 자기 자신을 완성시키는 것이 마지막이다(夫孝 始於事親 中於事君 終於立身).”라고 하였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昭公) 30년에도 “예라는 것은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기고, 큰 것은 작은 것을 사랑하고 양육해야 하는 것이다(禮者小事大大字小之謂).”라 하였다.


    『맹자(孟子)』양혜왕편(梁惠王篇)에는 “어질다는 것은 큰 것이 작은 것을 사랑하는 것이고 …… 지혜롭다는 것은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기는 것이다. …… 큰 것이 작은 것을 사랑하는 것은 하늘을 즐겁게 하는 것이고, 작은 것이 큰 것을 사랑하는 것은 하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惟仁者 爲能以大事小 …… 惟智者 爲能以小事大 …… 以大事小者 樂天者也 以小事大者 畏天者也).”라고 하였다.


    이 말들에서 중국중심의 전통적 세계관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사대는 사친(事親)이나 사군(事君)하는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유교의 세계관에서 효나 충은 가장 핵심적인 사상이며, 모두 사대하는 것과 같다.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것은 효로써 하되, 부모는 자식을 자애로써 사랑하고 양육한다. 마찬가지로 신하가 임금을 충으로써 섬긴다면 임금은 신하를 너그럽게 헤아려서[恕] 감싸야 한다. 따라서 사대는 사소(事小)의 짝으로서만 존재한다.


    『춘추좌씨전』에서는 사대는 작은 것을 사랑하는 자소(字小)의 짝으로 성립하고 있으며 그것이 예(禮)로 되어 있다. 『맹자』에서는 사소를 인(仁)이라 하고 사대를 지(智)라고 하며 아울러 사소는 낙천(樂天)이며 사대는 외천(畏天)이라고 하였다.


    언제나 음양의 조화를 중시하는 중국의 세계관에서 이처럼 사대는 사소와 짝할 때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事)라는 섬김은 의례적(儀禮的)인 관행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대와 사소의 관계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국가간의 세계질서에서도 적용되었다. 중국적 세계질서는 ‘천조예치(天朝禮治)’라고 하여 ‘하늘 아래 있는 세상은 하나의 왕조이고 그곳은 의례로써 다스려진다.’는 것이다. 조선 왕조에서 중국에 사대한다는 것도 이러한 것이었다.


    따라서 중국에 대한 ‘사대’의 업무를 관장하는 부서도 예조(禮曹)로서 『경국대전(經國大典)』예전(禮典) 사대조(事大條)에는 중국에 조공을 보내는 데 관련되는 의례를 기록하고 있다.


    중국은 선진시대(先秦時代)부터 천하에는 천명(天命)을 받은 천자가 있고 그 아래는 군신관계의 상하 위계적 서열로 세계질서가 형성된다고 보고 있다. 군신의 상하관계는 중국과 그 주변국가간의 관계에도 확대적용된다.


    이에 따라 조선왕조의 입장은 대국인 중국에 조공을 바쳐야 했고, 중국 황제는 조선의 왕을 책봉하였다. 중화(中華)와 외이(外夷)와의 의례적 관계에서 보면 조선의 사대는 조공으로 나타나고 중국의 사소는 책봉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른바 봉조제도(封朝制度)는 대소국간에 많은 의례적 교환을 수반하기 때문에 양자간에는 정치·경제·문화적으로 상호보완적인 교류가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의 경우 시대적 추이에 따라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유교가 주도적인 지배이념으로 정착하게 되는 조선 왕조에서 봉조제도는 한중관계의 기본성격이었다.


    중세적 세계질서가 흔들리지 않던 이 시기에 한중간의 이러한 사대관계는 평화적 외교관계였던 것이다. 소국으로서 대국과의 관계에서 자기의 독자성을 유지하기 위한 외교적 의례관행으로서의 사대는 적절하고 필요한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대가 사대주의라는 단어로 성립되어 국민성 또는 민족성과 연관되는 개념으로 사용된 것은 조선 왕조 말기의 전통사회에서 오늘날 현대사회로 넘어오는 과도기 상황에서 겪게 되는 우리 민족의 자기정체성 확인노력을 두고 일본인 학자들이 자행한 악의적인 표현에서 비롯되었다.


    19세기 중엽부터 서양제국주의는 중국의 중원을 유린하기 시작하였다. 서양 여러 나라들은 과학기술문명을 앞세우고 중국적 세계질서를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았다. 중국은 처음에 서양 열강들을 외이로 보고 사대(조공)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서양적 새로운 세계질서는 개인주의사상에 입각하여 국가간에도 위계서열적인 의례적 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외교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당시 서구열강들은 봉조의 의례관계를 인정할 수 없었고, 과학기술문명으로 무장한 제국주의는 무력으로 중국과 일본을 굴복시키고 문호를 개방시켰다.


    이는 동아시아에서의 새로운 질서의 본격적인 등장이었다.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우리나라는 중국과의 관계에서 의례적이었던 봉조관계를 새롭게 검토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수구적인 보수지배세력이 척양(斥洋)·척왜(斥倭)하며 청국을 사대할 것을 고집하였으나, 개화파인 독립당은 중국에 대한 사대관계를 청산할 것을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서양적 질서의 등장으로부터 사대라는 개념이 문제로 부각되었음을 유의하게 된다. 중국적 세계질서 대신 새로이 서양적 세계질서가 등장함에 따라 사대적 세계관은 파기되고 지양되어야 할 것으로 파악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은 중국중심의 세계관으로 여러 세기를 살아왔던 한국인들에게 갈등을 겪게 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갈등을 반영하여 개화독립당과 사대보수당이라는 두 개의 정치세력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각기 일본과 청국이 대표하는 서양중심의 세계질서와 중국중심의 세계질서를 좇으며 사대적 세계관을 문제로 삼아 고뇌하였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 민족의 자기정체성 확인노력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를 강점한 일제는 통치의 명분확보를 위하여 중국에 대한 역사적인 사대의례관행을 자율성이 아닌 타율성으로 해석하고, 우리나라의 역사를 남에게만 의지하는 사대주의적 역사라고 규정하였다.


    이리하여 한중관계의 기본성격이었던 사대적 의례는 외세의존적 사대주의로 규정되었던 것이다. 일제의 이러한 음모에 동원된 일본학자들은 사대주의경향은 대륙도 아니고 섬나라도 아닌 반도국가가 가지고 있는 지리적 특성에 연유한다는 지리적 결정론까지 내세웠다.


    그러나 사대는 중국적 세계관의 표현이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중국적 세계질서 내에 있었다는 것이 그 이유가 되는 것이지, 반도라는 지리적 조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함에도 일본인에 의한 이러한 주장은 나라를 잃었던 한국인에게는 주권상실의 이유를 스스로 반성하는 가운데 역설적으로 숙명론적 체념을 불러일으키게 했던 것이 사실이다. 동시에 그것은 민족적 열등감을 가지게 하는 근원이 되기도 하였다.


    광복 이후 또다시 외세에 의하여 조국이 분단됨으로써 한국인은 한계적 체험을 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한 자기비하의 관념과 함께 일본학자가 내세운 사대주의론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마저 없지 않았다.


    사대는 분명히 우리의 전통사회에서 대외관계의 한 특성으로 존재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를 대외인식의 한 틀로만 보지 않고, 한국인의 의존적인 국민성 내지 민족성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확대시킨 것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지배의 소산물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한국의 학자에 의한 사대주의 비판과 더불어 경제발전에 바탕한 국가적 기반확립에 따라 오늘날에는 사대주의에 대한 논의 자체가 불필요하게 되어가고 있다.


    사대주의는 결코 한국의 국민성이나 민족성일 수 없으며 한국인의 대외관계 인식의 한 특성일 뿐이다. 그런데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사대주의가 아닌 사대는 한국인의 전통적 세계관의 근간을 이루어왔다.


    이것은 곧 한국의 가족주의적 문화전통 속에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 있어서 새로운 자기정체성을 확립하는 작업에서 사대의 개념은 새롭게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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