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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루아지랑이392
신기루아지랑이39223.08.14

고려시대 공민왕의 업적을 요약해보자면 무엇이 있을까요?

고려시대 가장 많은 일들을 겪었고 가장 바빴었던 왕이 있습니다. 바롱 공민왕인데요. 역사적으로 공민왕이 국가적으로 하고자했던 정책들이나 업적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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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공민왕은 1341년(충혜왕 복위 2) 5월에 왕의 동생 강릉대군(江陵大君)이라는 신분으로 원나라에 들어가 숙위하였는데, 때 정승(政丞) 채하중(蔡河中) 등 30여 명이 호종(扈從)하였다.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여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으로 책봉되었고, 충목왕 사후 윤택(尹澤) 등 다수의 고려 신료들이 몽골에 글을 올려 공민왕의 즉위를 요청했으나, 고용보(高龍普) 등 부원세력(附元勢力)의 지원을 받은 충정왕(忠定王)이 즉위함으로써 왕위 계승에 실패했다.


    그 뒤 공민왕은 그대로 원나라에서 숙위하고 있다가 1351년(충정왕 3) 원나라 황실이 외척 세력의 전횡과 국정 문란의 책임을 물어 충정왕을 폐위시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공민왕이 재위한 시기는 원나라 간섭이 계속되는 가운데 명나라가 건국되어 원명 교체의 길목에 들어선 시기였다. 국내적으로는 왜구의 잦은 침탈과 홍건적의 침입으로 토지가 황폐되고 인명 손실이 커서 민생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었다. 공민왕은 이같은 국내외 정세 속에서 여러 차례 개 혁정치를 추진하여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민생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1356년(공민왕 5) 5월 공민왕은 기철(奇轍) · 권겸(權謙) · 노책(盧) 등 부원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반원 개혁을 추진하였다. 먼저 5월 18일에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를 혁파하고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회복하였다. 6월 4일에는 인당(印璫)이 압록강을 건너 파사부(婆娑府) 등 3참(站)을 공격하여 이를 고려 영토에 편입하였다. 6월 26일에는 원나라 지정(至正) 연호의 사용을를 중지하여 고려가 원의 종속으로부터 벗어났음을 선언한 다음, 사회 전반의 개혁을 표방하는 개혁교서를 반포하여 국정 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1359년(공민왕 8) 11월 홍건적(紅巾賊) 침입에서부터 1364년(공민왕 13) 9월 원나라의 덕흥군(德興君) 옹립이 분쇄되기까지 5년 동안 벌어진 몇 차례의 외침과 반란은 공민왕을 위기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계속되는 왜구 침탈,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 침입, 국왕의 안동 몽진(蒙塵), 정세운(鄭世雲) · 이방실(李芳實) · 안우(安祐) · 김득배(金得培) 등 살해 사건, 김용(金鏞)의 흥왕사(興王寺)의 변, 원나라의 덕흥군 옹립과 최유(崔濡)의 침입 등 일련의 외침과 내란은 공민왕의 왕위를 위협하면서 국정 운영의 동력을 상실하게 만들었으며, 민생 문제를 더욱 심각한 국면으로 치닫게 하였다.

    공민왕은 이 같은 정치적 위기 국면을 신돈(辛旽)을 기용하여 해결하려고 하였다. ‘세신대족(世臣大族)’ ‘초야신진(草野新進)’ ‘유생(儒生)’ 출신 등 기존 정치 세력에 대해 부정적 입장이었던 공민왕은 1365년(공민왕 14) 2월 왕비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으로 이 같은 선택을 앞당겼다. 공민왕은 1365년 5월 신돈을 기용하면서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최영(崔瑩) 등 무장 세력을 숙청하여 왕권 강화의 기반을 마련한 다음, 신돈이 주도하는 개혁 정치를 지원하였다.


    신돈 집권기의 개혁은 토지 문제의 해결과 교육 개혁, 관료 체제의 정비에 역점을 두었다. 토지 문제의 해결은 권력층이 탈점한 토지의 환수와 천민에 대한 속량 조치를 표방한 전민변정사업(田民辨正事業)으로 나타났으며, 교육 개혁은 국학 중흥 사업으로 가시화되었다. 아울러 산관(散官)에 대한 통제와 순자격제(順資格制)의 실시를 통해 관료 체제의 정비와 정치 기강을 확립하는 한편, 내재추제(內宰樞制)를 시행하여 권력 구조를 개편하고 이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신돈을 기용하여 개혁 정치를 추진하고 왕권을 강화해 온 공민왕은 1369년(공민왕 18) 초부터 국내 정치 세력의 반발과 지나친 노동력 징발에 따른 민생 문제의 악화, 새로 흥기한 명의 압력으로 다시 위기를 맞고 있었다. 공민왕은 이 같은 위기 국면을 친정(親政) 선언과 신돈의 숙청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였다. 왕은 1370년 10월 친정을 선언한 다음, 이듬해 7월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로 신돈을 수원에 유배하였다가 그곳에서 처형하였다.


    공민왕은 신돈 숙청 5개월 뒤 다시 개혁 교서를 반포하였다. 심각한 민생 문제를 완화하는 한편 신돈 정권의 붕괴에 따라 가시화될 수 있는 왕권의 위기를 개혁 정국의 조성을 통해 타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군사 체제를 정비하여 왜구 침입에 대비하고, 주로 문벌 출신 자제들로 구성된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명의 압력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의 이같은 정치 목표는 1374년(공민왕 23) 9월 환관 최만생(崔萬生)과 홍륜(洪倫)을 비롯한 자제위 소속 관리들이 왕을 시해(弑害)함으로써 더 이상 실현될 수 없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공민왕은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원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정동행성을 없애고,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영토를 회복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징비록을 편찬해 국가의 역사와 국민의 지혜를 기록, 전승함으로써 국가의 정체성을 강화, 반원자주정책으로 쌍성총관부 탈환, 몽골풍 금지, 정동행성 이문소 폐지, 기철 등의 친원 세력 숙청 등이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공민왕은 왕권강화를 위해 정방을 폐지하고 반원자주정책을 펼쳐 몽고풍을 금지시키고 정동행성 이문소 폐지 기철 등 친원세력을 숙청하고 몽고가 설치한 쌍성총관부를 폐지한 것입니다. 영토수복을 위해 요동정벌도 행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조사를 해본 결과 공민왕은 고려의 제31대 왕으로, 1352년부터 1374년까지 재위했습니다. 공민왕은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원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공민왕의 반원 개혁은 대외적으로는 원나라의 풍습과 연호 및 관제를 폐지하고 문종 때의 옛 제도로 복구시켰으며, 정동행성과 쌍성총관부를 철폐하였습니다. 대내적으로는 친원파를 숙청하고, 정방을 폐지하여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 또한 공민왕은 신돈을 등용하여 불법적인 농장을 없애고 토지를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며, 농장의 노비들을 양인으로 해방시켰습니다. 공민왕의 개혁은 고려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으며, 고려의 독립을 견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공민왕의 업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반원 개혁 추진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

    정방 폐지

    신돈 등용

    농장 개혁

    노비 해방

    고려의 독립 견지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 & 추천 부탁드려요 ~좋은 하루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