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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운찬갈매기134
기운찬갈매기13423.02.22

4ㆍ19혁명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뭔가요?

1960 년에 일어난 4ㆍ19혁명은 어떤혁명이며

4ㆍ19혁명이 일어나게된 배경과

그로인해서 어떠한 결과가 나타났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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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낙지알쌍한55입니다.

    대한민국 초대 정부인 이승만 정부는 계속되는 독재 정치와 경제적 어려움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잃어 갔다. 이 때문에 1960년 3월 15일에 시행될 정 · 부통령 선거에서 패할 것이 우려되자 경찰과 행정 기관을 시켜 대규모 부정 선거를 저질렀다.

    선거 당일 마산에서는 부정 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정부는 최루탄과 총을 발사하며 폭력으로 시위를 진압했다. 그러나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는 다른 지역에서도 일어났고, 시위대는 이승만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다. 그러던 중 4월 11일에 마산 시위 때 행방불명되었던 마산 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체가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바다에서 발견되었다. 이에 분노한 국민들의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시위도 한층 거세졌다.

    4월 19일에는 서울과 부산 등 전국 곳곳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날 시위는 부정 선거 이후 최대 규모로 발전했는데, 경찰이 총을 쏘아 115명이 죽고 727명이 부상당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이승만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해 분노한 국민들의 시위를 막으려고 했지만, 계엄군조차 섣불리 진압에 나서지 않아 시위는 계속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부통령에 당선된 이기붕을 물러나게 해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다. 그러나 국민들은 계속 대통령인 이승만이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4월 25일의 시위에서는 대학 교수들도 “학생들의 피의 대가에 보답하라.”며 참여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그칠 줄 모르자, 미국도 더 이상 이승만 정부를 지지하지 않았다. 결국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물러나겠다는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이로써 12년에 걸친 제1공화국도 끝이 났다.


  • 안녕하세요. 정중한해파리168입니다.

    1960년 4월, 대한민국에서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항거해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대한민국 제1공화국을 끝낸 민주주의 시민 혁명이다. 이승만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3.15 부정선거에 시민들이 항거하여 대대적으로 일어난 이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엄밀히 따지면 2.28 학생민주의거3.15 부정선거로 인한 시위가 4.19의 서막이다.

    4월 27일 이승만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갑자기 막무가내로 거부했다. 이미 방송으로 다 나갔는데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비서들의 잇따른 사임서 사인 요구에 버텼다.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늙은 독재자의 최후의 몸부림이었다. 허정도 설득하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고, 김정렬이 나서서 또 촉구했지만, 이승만의 대답은 역시 '사임하면 온 국가가 혼란에 빠질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허정이 질서를 확고히 유지할 수 있다고 역설하자 그때서야 어쩔 수 없었던지 사임서에 사인을 해 국회에 제출할 수 있었다


  • 안녕하세요. 꼼꼼한치와와291입니다.


    백과사전에 요약본을 보면


    1960년 4월 19일 학생과 시민이 중심 세력이 되어 일으킨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로 이어졌다.


    이승만 정권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발췌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 불법적인 개헌을 통해 12년간 장기 집권하였다. 그러다 1960년 3월 15일 제4대 정·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가 실시됐는데, 자유당은 반공개 투표, 야당참관인 축출, 투표함 바꿔치기, 득표수 조작 발표 등의 부정선거(3·15 부정선거)를 자행하였다.


    이에 같은 날 마산에서 시민들과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당국은 총격과 폭력으로 강제 진압에 나섰다. 그 결과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은 물론 무고한 학생과 시민들이 공산당으로 몰려 고문을 당했다.


    그러던 중 4월 11일 1차 마산시위(3월 15일)에서 실종되었던 고등학생 김주열 군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시체로 발견됐고, 이에 분노한 시민들의 제2차 시위가 다시 일어났다. 이후 4월 18일 고려대학교의 3천여 명의 학생들은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하여 봉화를 높이들자>는 선언문을 낭독,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가던 중 괴청년들의 습격을 받았고, 일부 학생들은 큰 부상을 입었다.


    이에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다음 날인 4월 19일 총궐기하여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쳤다. 그러나 이승만 독재정권은 총칼을 앞세운 무력으로 시민들을 탄압하고 비상계엄령까지 선포하였다. 그리고 4월 25일 이승만 정권의 만행에 분노한 서울 시내 각 대학 교수단 300여 명은 선언문을 채택하고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다. 여기에 4월 26일 전날에 이어 서울 시내를 가득 메운 대규모의 군중들은 정권의 무력에도 굽히지 않고 더욱 완강하게 투쟁하였고, 결국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하야하였다.


    라고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진화하였고, 선출직인 대통령도 국민의 눈치?를 안볼수가 없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