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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태양새285
탁월한태양새28523.05.12

칠천량 전투가 무슨 전투인가요???

안녕하세요.

칠천량 전투는 무슨 전투였나요?

언제 일어난 사건이며

그 당시에 사건이 일어날 때 어떠한 상황이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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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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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2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임진왜란·정유재란 가운데 조선 수군이 유일하게 패배한 해전이다.

    임진왜란 중 명나라와의 화의가 결렬되자, 일본은 1597년 1월 다시 조선을 침범했다. 일본은 지난번 조선 침범이 실패한 것은 바다를 제패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해 먼저 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을 제거하려는 이간책을 꾸몄다.

    당시 조정에서는 중신들이 당쟁에 휘말려 이순신을 하옥하고 원균을 수군통제사로 임명한 상태였다. 일본군은 조선 수군을 부산 근해로 유인해 섬멸하려고 일본의 이중첩자인 요시라(要時羅)를 시켜 유혹했다.

    이에 도원수 권율(權慄)은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과 상의해 원균에게 출전명령을 내렸다. 원균은 무모하게 출전해 보성군수 안홍국(安弘國) 등을 잃고 되돌아왔다. 그리고 한산도의 본영(本營)에 앉아서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이 웅천(熊川)을 급습하도록 하였다.

    배설이 전선(戰船) 수십 척을 잃고 패하자, 권율은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원균을 태형(笞刑)에 처한 뒤 다시 출전하라고 명하였다.

    원균은 부산의 적 본진(本陣)을 급습하려고 삼도 수군 160여 척을 이끌고 한산도를 출발하였다. 7월 14일 원균은 부산 근해에 이르러, 이 사실을 미리 탐지한 적들의 교란작전에 말려들어 고전하였다.

    더욱이 되돌아오던 중 가덕도에서 복병한 적의 기습을 받아 400여 명을 잃었다. 원균이 칠천량(지금의 거제시 하청면)으로 이동하여 무방비 휴식 상태에 있을 때 적은 조선 수군을 기습할 계획을 세웠다.

    도도(藤堂高虎)·와키사카(脇坂安治)·가토(加藤嘉明) 등 수군 장수들이 7월 14일 거제도 북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15일 달밤을 이용해 일제히 수륙양면 기습작전을 개시하였다.

    이에 당황한 원균과 여러 장수들은 응전했으나 적을 당해낼 수 없어 대부분의 전선들이 불타고 부서졌다.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와 충청수사 최호(崔湖) 등 수군 장수들이 전사하였다. 원균도 선전관 김식(金軾)과 함께 육지로 탈출하였다.

    그러나 원균은 일본군의 추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경상우수사 배설만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남해 쪽으로 후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삼도 수군은 일시에 무너지고 적군은 남해 일원의 제해권을 장악해 서해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우키타(宇喜多秀家)·고니시(小西行長)·모리(毛利秀元) 등은 쉽게 남원 및 진주 등지로 침범하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7월 21일 원균과 함께 탈출하다가 원균은 죽고 겨우 살아 나온 김식에게서 패전 보고를 듣고 크게 놀라 백의종군(白衣從軍)하고 있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해 수군을 수습하게 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칠천량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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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유재란 당시 1597년 7월 16일 새벽 경상도 거제 땅 칠천량 해협에서 통제사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 연합함대가 일본군에게 크게 패배하여 최고 지휘관을 포함하여 해전 경험이 풍부한 많은 지휘관들이 전사하고 함대와 병력 모두 완전히 궤멸된 해전입니다.

    조선수군 주력 전투함 판옥선의 성능은 일본의 주력 전투함 세키부네보다 훨씬 크고 튼튼하며 총통 탑재 및 제자리 선회가 가능한 우수한 성능과 기동 능력을 자랑하는 전투합이고 그런 전투함에 승선했던 병사들은 당시 조선 최고의 정예군이었으며 조선수군 최강 돌격선으로 불리며 그 위용을 자랑하던 일본군이 가장 무서워했던 거북선이 있었으며 판옥선과 거북선에 탑재했던 총통이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등으로 일본군의 화력을 크게 압도했습니다.

    병력도 그 위용과 명성에 맞게 갖추어 일본군에게 전혀 밀리지 않았고 질 역시 많은 해전에서 승리해 해전 경험이 풍부한 자들 위주의 전력이었지만 현실은 패배였습니다.

    칠천량 해전 당시 조선 최대 규모의 하삼도 정예병이 전투를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순식간에 무너져 궤멸되면서 정유재란이 끝나는 순간까지 조선 수군은 예전처럼 완벽하게 재건되지 못했고 평야지대이자 조선 최대의 곡창지대인 호남이 뚫리고 이후 이순신이 명량 해전에서 상술한 최악의 사태는 막았지만 이순신 스스로도 하늘이 도와 이겼다고 할 정도로 매우 불리한 상황에서 싸워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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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순신이 투옥되자 조선 수군의 세력과 사기는 현저히 약화되었습다. 이 때 왜장 小西行長(고니시 유키나가)이 경상우병사 金應瑞에게 보내어 왜군의 후속 부대가 곧 바다를 건너오니 조선 수군이 그들을 기습하면 틀림 없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제공하였습니다. 이것은 왜군이 그들의 유일한 대항세력인 조선 수군을 괴멸시키기 위한 정보였으나 조정은 이에 대한 대비책 없이 수군에게 출전 명령을 하달하였습니다. 당시 원균을 위시한 수사들은 지상군의 협조 없이 수군 단독작전을 할 경우 패전이 확실하다고 하여 출전 거부의사를 표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조와 조정대신 그리고 지상군의 장수들은 ‘수군이 바다로 나가 군의 위용을 보이면서 적을 칠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수군을 힐난하였습니다.

    조정의 명령을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자 조선 수군은 3도군선 200여 척에 분승하여 한산도를 출발, 부산으로 향했습니다. 조선 수군은 다대포에서 왜선 8척을 격침시킨 후 절영도 해역에 이르렀을 때 왜선 1천 척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세력의 현격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왜선과 격전을 벌렸던 조선 수군의 함선 일부가 서생포로 표류되어 왜군에게 나포되었고, 풍랑이 점차 강해져 격전을 포기하고 가덕도로 회항하였습니다. 종일 풍랑과 전투에 시달린 수군들은 휴식을 취하려고 섬에 오르던 중 왜군 복병의 기습을 받아 4백여 명이 희생되었습니다. 탈출에 성공한 잔여병력이 함선을 이끌고 칠천량으로 퇴주하여 전열을 정비하던 중 왜군의 기습을 받아, 전투를 회피하고 도주한 12척 군선을 제외한 조선 군선은 모두 격침되었습니다. 조선 수군이 완전히 와해된 이 해전을 칠천량해전이라 부릅니다. 조선 수군이 패전하게 된 것은 조정의 무리한 출전 강요가 주 원인이었으나 원균의 전술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즉 이순신이 조선 군선을 집중시켜 적선이 분산되었을 때 공격하여 승리했던 것과는 달리 원균은 열세한 군선으로 다수의 적선을 분산 공격케 하는 전술을 구사했습니다. 이는 열세한 군사력으로 우세한 적군을 공격하는 모양이 되어 그 결과는 패배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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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임진왜란 후 정유재란 당시였던 1597년 (선조30년) 7월 16일 새벽 경상도 거재 땅 칠천량 해협에서 통제사 원균 조선 수군 연합함대가 왜군에게 크게 패배하여 최고 지휘관을 포함하여 해전경험이 풍부한 많은 지휘관들이 전사하고 함대와 병력이 모두 완전히 궤멸된 해전으로, 세계 해전사에 그 유례를 찾기 힘들며 씻을 수 없는 굴욕적이고 치욕적인 패배로로 끝난 해전으로 기록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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