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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센때까치29
굳센때까치2923.06.16

애국 계몽 운동은 무엇인가요?

을사조약 이후 애국 계몽 운동이 일어난 것으로 알고있는데요. 애국 계몽 운동의 배경이 무엇이고, 그 결과로 어떤 결실을 맺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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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16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애국계몽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 민족은 1905년 11월 이른바 ‘을사조약’에 의해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국권의 일부를 빼앗기자 새로이 당면한 민족적 과제로서 국권회복운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하였습니다.

    당시 한국 민족의 국권회복운동은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의 양면에서 전개되었습니다. 개항 후 한국 민족이 상당 기간 열강의 침입에 대해 완강한 항쟁을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국권을 박탈당한 것은 ‘힘’과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인식이 한국인들 사이에서 널리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빼앗긴 국권을 다시 찾는 것은 힘을 기르지 않는 한 어려운 과제였고, 당시 한국 민족의 국권회복운동은 처음부터 장기전을 전제로 한 운동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장기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전력의 장기간 공급 능력을 의미하는 ‘실력’의 배양과 축적이었습니다.

    애국계몽운동의 경과와 의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1910년, 일제의 완전한 조선 병탄이 닥쳐오고 국내에서의 실력 양성을 통한 국권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더욱 확실해짐에 따라 국외에서의 무장투쟁노선을 채택하여 러시아나 중국 영토에서의 독립군기지 건설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미국으로 가서 흥사단을 조직한 안창호 등의 운동노선으로 이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위와 같은 애국계몽운동·자강운동의 성격에 대한 평가는 대개 세 갈래로 나뉩니다. 반제반봉건에 충실했던 애국적이고 진보적인 운동으로서 대중을 계몽하고 민족적 자각을 높였으며 부르주아 민족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반면에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한 비판도 불철저하고 보수적인 성향도 강하며 무력 항쟁을 포기하고 문화운동만으로 활동영역을 축소하였다는 비판으로부터 심지어는 제국주의이론을 그대로 수용하여 이를 정당화해주고 있던 운동이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한편 이 운동 내부에는 긍정적인 흐름과 부정적인 흐름이 함께 있었다거나, 운동의 여러 주체에 따라 현실인식과 운동노선이 달랐으므로 그들을 더욱 세분하여 분석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국 민족은 1905년 11월 을사조약에 의해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국권의 일부를 빼앗기자 새로이 당면한 민족적 과제로서 국권회복운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합니다.

    당시 한국 민족의 국권회복운동은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의 양면에서 전개되었으며 개항 후 한국 민족이 상당기간 열강의 침입에 대해 완강한 항쟁을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국권을 박탈당한 것은 힘과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인식이 한국인들 사이에서 널리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빼앗긴 국권을 다시 찾는 것은 힘을 기르지 않는 한 어려운 과제였고, 당시 한국 민족의 국권회복운동은 처음부터 장기전을 전제로 한 운동이 될 수 밖에 없었으며 장기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전력의 장기간 공급 능력을 의미하는 실력의 배양과 축적이었습니다.

    애국계몽운동은 한말 한국 민족의 국권을 빼앗아간 일본 제국주의의 실력과 국권을 빼앗긴 한국민족의 실력의 격차를 객관적으로 인식한 한국인들이 자기 민족의 힘과 실력을 양성하여 궁극적으로 자기 민족의 힘으로 국권을 회복하려는 운동을 포괄적으로 말하며, 문화운동, 신교육구국운동, 언론계몽운동, 실업구국운동, 국채보상운동, 신문화, 신문학운동, 국학운동 , 민족종교운동, 해외독립군기지 창건 운동 등이 주요내용이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실력 양성과 문명 개화를 목적으로 한 계몽운동단체가 설립되기 시작한 것은 을사늑약주1이 체결되기 이전부터였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대한제국 정부에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압하여 우리나라를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려 하자, 국망의 위기를 느낀 지식인들은 보안회(保安會),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 공진회(共進會),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 등 계몽운동단체를 설립하였다.


    애국계몽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1905년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이 체결되고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하여 통감 정치가 실시되면서부터였다. 대한자강회를 시작으로 여러 계몽운동단체가 설립되고 각 지역을 기반으로 교육운동을 실시하기 위한 학회도 설립되었다.


    애국계몽운동단체의 설립과 활동을 시기별, 내용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을사늑약 체결 이전에 설립된 계몽단체로는 보안회, 공진회, 헌정연구회, 국민교육회 등이 있었다.


    보안회는 일제가 러일전쟁주2 중 우리나라의 전국 황무지 개간 점유권을 획득하기로 결정하고 대한제국 정부에 허가를 강요하자 이를 막기 위해 설립된 단체였다. 보안회는 1904년 7월 13일 서울 종로 백목전에서 송수만, 원세성, 양한묵 등을 중심으로 100여 명의 서울 시민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설립 직후 회원 수는 3,000명으로 증가하였고, 반대 집회와 가두 행진에는 약 5,000명의 회원과 시민들이 참가하여 일본의 요구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처럼 우리나라 국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한 일제는 보안회의 운동이 전국적인 반일 운동으로 확대할 것을 염려하여 결국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철회하였다.


    공진회는 1904년 8월 독립협회 관련자 일부가 중심이 되어, 친일 단체인 일진회를 결성하자 이에 반대하는 독립협회 관련자와 러일전쟁 발발 이래 반일적인 활동을 벌이던 보부상이 결합하여 12월에 설립된 단체였다.


    공진회의 주요 활동은 계몽운동과 정부에 대한 시정 개선의 요구에 집중되었으며, 특히 관심을 기울인 것은 정부에 대한 시정 개선의 요구였다. 하지만 공진회의 시정 개선 요구는 제도적인 개혁보다는 탐관오리의 부패부정 척결과 궁정 잡배를 축출할 것을 요구하는 수준에 그쳤다.


    공진회는 1904년 12월 25일 일진회의 활동을 비난하는 공개 연설회를 개최하고, 정부에 대해 황실의 권위를 지킬 것과 정부의 명령과 국민의 권리, 의무 등에 관해 건의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공진회와 일진회의 대립이 격화되고 정부에 대한 요구도 거세지자 정부는 이준 등 공진회의 간부를 체포하였다.


    공진회 지도부가 구속되자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발발하고 일진회하고도 충돌하였다. 결국 일본군의 개입과 탄압을 받은 공진회는 더 이상 활동을 이어 가기 어려웠고 1905년 2월 12일 해산 명령을 받고 해산되었다.

    애국계몽운동은 교육운동과 계몽운동을 통해 일반 민중의 실력을 양성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성과를 거두었고, 이는 이후 민족해방운동의 밑바탕이 되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애국계몽운동의 한계점 역시 지적할 수 있다. 당시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했던 계몽운동가와 지식인들은 사회진화론을 수용하여 당 시대를 생존경쟁과 약육강식의 시대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국권 회복의 방법으로 실력양성을 채택하였지만, 일부 인사들은 국권 상실의 원인을 제국주의적 침탈이 아닌 문명개화를 이루지 못한 대한제국 내부의 문제로 파악하여 일부 계몽운동가들은 일제에 타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