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초기만해도 비변사는 없었는데 추후 비변사가 핵심 기구로 자리잡은 배경이 무엇인가요?
조선초기만 해도 즉 세종대왕이나 세조시절에도 비변사는 없던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후 조선을 보게되면 비변사가 많이 언급되는데요. 이 핵심기구는 어떻게 자리를 잡고 탄생한것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설치 초기에는 변방의 군무를 담당하였으나, 임진왜란을 계기로 국가의 모든 사무를 총괄하는 최고 의결기관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는 전쟁 기간 동안 원활한 군사 작전과 각종 조치를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해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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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변사는 성종때 , 왜구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의정부 정승 및 원상과 병조 이외에 국경 지방의 요직을 지낸 경험자들을 필요에 따라 참여시켜 군사 방략을 협의시키는데 이들을 지변사재상이라 했습니다.
지변사재상을 설치한 이유는 군무에 관한 정승의 전문성 부족으로 비변사가 처음 설치된 성종 시기 6조직계제였으므로 의정부에 소속된 정승이 군무에 참여하는 것이 제한적이었고, 경험 부족으로 재상이 군무에 능하지 못했으므로 이를 보완하기 위해 지변사재상이 필요했습니다.
또 병조의 미약한 권위로, 병조는 정승을 능가하는 권위를 가지지 못했으므로 외적의 침입 등 변방에 국가적 비상 사태가 발생하면 병조 단독으로 군사문제를 처결할수없어 정승의 권위에 의존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군사적 전문성을 구비하면서 정승의 권위에 기대려고 한 것이 지변사재상의 시작점입니다.
1510년 삼포왜란을 계기로 1517년 기존 임시 기구인 축성사를 비변사로 고치면서 그동안 변칙적으로 운영되어 온 지변사재상이 비변사라는 명칭으로 처음 기구화 됩니다.
당시 아직 임시 기구로 독립적인 청사를 가지지 못했고 이때까지 비변사는 기존 병조의 하위 부서, 즉 속사인 무선사, 승여사, 무비사 3사 외에 임시로 설치된 1사로서 변방에 중대한 사건이 있을 때만 활동했습니다.
1555년 을묘왜변으로 인해 상설 기구로 전환할 필요성이 제기되어 별도의 전용 청사를 마련하고 전속 관원이 임명되어 독립 관청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비변사를 전쟁 수행의 최고 기구로 활용함에 따라 그 기능이 확대, 강화되는데 이때 수령의 임명, 군율의 시행, 논공행상, 청병, 둔전 등의 기능을 가지며, 비변사는 군무에 대한 처결 뿐 아니라 지방관 임명, 조세, 사회 복지, 조직 제,개편 등 주요 국정 전반을 관장하게 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비변사는 조선 후기 국방과 군사에 관한 기말을 담당하는 기구로 설치하였으나 점차 국정 전발을 총괄하는 기구로 확대됩니다. 비변사가 설치가된 시기는 조선 중종 5년(1510년) 삼포왜란 을 계기로 방어책을 마련하기 위해 임시 비상 시국 기구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명종 9년(1554) 을묘왜변으로 상설 기관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비변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그 역할이 강화되었습니다. 3정승을 비롯한 고위 관리로 구성원이 확대되고 군사 문제뿐만 아니라 외교, 인사 관리, 재정 등 국가 정책 전반을 논의하고 집행하는 최고 기구로 위상이 높아졌습니다. 왜란이 끝난 후에도 전후 복구 사업과 후금(청)의 침략, 그리고 사회적·경제적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비변사의 위상은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그결과 의정부와 6조 중심의 행정 체계는 제구실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주요 관리들이 비변사에 모여 국정을 논의하고 각종 정책을 결정하면서 업무의 효율성이 높았습니다. 비변사 중심의 국정 운영 체제는 19세기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세도 가문이 비변사를 장악하여 국정을 농단하면서 비변사는 점차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 바뀌었으며, 마침내 고종 초 비변사가 축소, 폐지되고 의정부의 기능이 부활하면서 비변사 체제는 해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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