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갑신정변은
① 일본군을 끌어들여 민심의 저항을 초래한 점
② 고종의 이반과 권력 기반의 조성에 실패한 점
③ 좌우영군의 장악을 소홀히 하여 이탈을 방조하고 무기를 정비하지 않은 점
④ 독립과 개화라는 정변의 목표와 지향이 당대의 사회적 요구나 정서와 거리가 있었던 점
⑤ 일본과 청이라는 외세의 본질적 속성에 대한 파악의 미흡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실패하였습니다.
정변 실패 결과 참여자들에게는 적몰가산(籍沒家産), 파가저택(破家瀦澤)의 형이 집행되었고 부모, 형제, 처자에게도 연좌법이 적용되었다. 갑신정변 주도자 혹은 참여자 중 사망자 44명, 일본 망명자 9명, 유배자가 1명으로 확인된다. 이외에도 김옥균과 내통 혐의를 받은 자들은 숙청되었다.
갑신정변은 나라를 팔고 겨레를 배반한 사건으로 이해되었고, 그 결과 개화 정책 전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개화에 대한 인식 악화는 개화 정책의 중단, 개화세력의 위축, 여론을 등에 업은 수구세력의 반동으로 이어졌다. 고종은 김옥균 등을 난적으로 규정하고 변란으로 규정하며 처벌 의지를 내비쳤다. 이어서 개화 정책 관련 기구를 폐지했고, 위정척사 계열 인물들을 대거 석방하였다.
정변 이후 청의 조선 내정에 대한 영향력은 더욱 강화되었고, 친청파들이 정국을 좌우하였다. 하지만 고종은 왕권 회복을 위한 물밑 작업을 진행하여 러시아에 군사적 보호를 요청하는 조러밀약을 추진하는 한편, 1885년에는 개화 자강 업무를 추진할 내무부를 설립하여, 정부 정책면에서 정변의 반동과 역효과는 오래 가지 않았다.
일본측은 정변으로 소실된 공사관 건물에 대한 배상과 조선 정부측 사죄를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1885년 1월 9일(음력 1884년 11월 24일) 「한성조약」이 체결되었다. 한편 정변 후 청일 양국군이 주둔하던 상황에서 양국 간 개전 가능성에 대한 불안감이 고조되던 가운데, 주중영국공사 파크스(Sir Harry S. Parkes)의 중개를 통해 청일 양국군의 철수를 규정한 「텐진조약」이 1885년 4월 18일 체결되었다.
특히 이 조약에서 장래 조선에 변란이 발생할 경우 청일 양국이나 한 나라가 파병할 경우 상대방에 알린다는 내용은 이후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일본이 파병할 수 있는 근거로 작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