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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찬하늘소177
힘찬하늘소17723.07.26

충무공 이순신과 동명이인인 무의공 이순신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우리 역사를 이야기할때 빠질 수 없는 임진왜란 당시의 구국영웅인 충무공 이순신과 동시기에 동명이인이었던 무관인 무의공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무의공 이순신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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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27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의 휘하 장수로 활약해 선무공신 3등으로 봉해졌습니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字)는 입부, 시호는 무의(武毅)이다. 충무공 이순신과 구분하기 위해 ‘무의공 이순신’이라고 부르며, 충무공의 《난중일기》에 방답첨사라는 직위로 자주 언급되어 ‘방답첨사 이순신’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조선 태종(太宗)의 맏아들인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의 후손으로, 의정부 좌찬성 등을 지낸 이진(李眞)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황(李滉)의 문인인 김성일(金誠一)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1577년(선조 10)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과 의주판관등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상관과 불화하여 파직되었다가 1591년(선조 24) 방답진(防踏鎭) 첨절제사(僉節制使)로 부임하여 당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이던 충무공 이순신의 휘하에서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본관은 전주, 자는 입부, 시호는 무의 이며 충무공 이순신과 구분하기 위해 무의공 이순신으로 불리며 충무공의 난중일기에 방답첨사라는 직위로 자주 언급되어 방답첨사 이순신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조선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 이제의 후손으로 의정부 좌찬성 등을 지낸 이진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황의 문인인 김성일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1577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과 의주판관 등을 지냈으나 상관과 불화하여 파직되었다가 1591년 방답진 첨절제사로 부임하여 당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이던 충무공 이순신의 휘하에서 왜적의 침입에 대비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은 충무공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에서 중위장과 전부장으로 활약, 옥포해전과 합포해전, 고성해전, 사천해전 등에서 큰 공을 세웠고 충무공 이순신은 1593년 선조에게 방답첨사 이순신이 적과 싸울때 언제나 선두에 공을 세웠으나 적을 죽이고 적의 배를 침몰시키는데만 힘쓰고 머리를 베는 일은 힘쓰지 않아 홀로 공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보고를 올리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이순신은 당상관인 정 3품 절충장군의 품계를 받았고 1594년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으나 이순신은 사간원의 관리들에게 형률을 지나치게 엄하게 적용해 백성의 원성을 사고 성격이 교만하고 탐욕스럽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탄핵을 받았습니다.

    1595년 조도어사로 파견된 강첨에게 군량미 200여 섬을 감추어 두었다는 혐의로 심문을 받는 일도 겪었고 후 이순신은 평안도우후를 거쳐 암록강 인근의 고령진 첨사로 좌천,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은 경상우수사로 임명되어 다시 왜군과의 해전에 참전했고 삼도수군통제사이던 충무공 이순신의 휘하에서 다시 중위장 등으로 활약하며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습니다.

    1598년 이순신은 전라수사로 있으면서 그해 음력 8월 조정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왜군이 철수를 준비하고 있다는 첩보를 비밀리에 전달하기도 했으며 음력 11월 노량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이 전사 후 경상우수사로 있으면서 충무공을 대신해 조선 수군의 전열을 수습했습니다.

    당시 명나라 수군을 이끌었던 진린은 이순신을 충무공의 뒤를 이어 통제사로 삼는 것이 좋겠다는 게첨을 선조에게 보내오기도 했으나 조정 관리들의 반대로 그대로 경상우수사의 직위에 머물렀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이순신은 1598년 한양의 포도대장으로 임명되지만 그해 음력 10월 직위를 남용해 잘못이 없는 사람을 장살했다는 이유로 탄핵받아 파직, 다시 충청수사로 임명됩니다.

    황해도 병마절도사, 수원부사,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1602년 전라좌수사가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도 그는 계속해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이순신은 조정 관료들의 견제로 외직을 전전하다 1604년 중추원의 정 3품 무관인 첨지중추부사가 되었고 그해 선무공신 3등으로 책록되지만 1606년 다시 외직인 수원부사로 임명,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1608년 임해군의 옥사에 연루되어 심문을 받았으며 1610년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나 이듬해 사망했습니다.

    그는 숙종 때인 1679년 무의의 시호를 받았습니다.


  •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무의공 이순신은 조선 중기의 무신 입니다.

    본관은 전주 자는 입부 시호는 무의공 입니다. 봉호는 완천군 입니다.

    충무공 이순신의 한글 발음은 같지만 이름의 한자가 다르고 본관도 다릅니다.

    충무공 이순신의 부하였으며 충무공 이순신의 절친 이기도 합니다.

    무의공 이순신은 1554년 경기도 금천면 서면 일직리(현 광명시 일직도)에서 양녕대군의 5번째 서자인 장평도정의 4대손 순충보조공신 둥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완원군 이진과 안동김씨 성균관 진사 김구수의 딸인 정경 부인 김씨의 5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578년 무과에 급제하여 온성판관.의주판관 등을 거쳐 잠시 귀향했다가 혜산진 병마첨절제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쟁기간 내에 충무공 휘하에서 수군 지휘관으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무의공 이순신(李純信, 1553년[1] 12월 27일 ~ 1611년 9월 2일)은 조선 중기의 왕족, 무장, 유학자이입니다. 임진왜란 때에 활동하던 장수로 그의 상관이기도 했던 충무공 이순신, 등림수 이순신 등과의 구별을 위해 무의공 이순신, 입부 이순신으로 불립니다. 본관은 전주. 양녕대군의 다섯째 서자 장평도정의 4대손이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9대 방조가 됩니다. 시호는 무의(武毅), 자는 입부입니다.


  •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무의공 이순신은 양녕대군의 후손으로 1578년(선조 11년)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의주의 판관, 혜산진 첨절제사로 근무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중위장·전부장으로 옥포·합포·적진포·당포·한산도·부산포 해전 등에서 활약하였고, 정유재란 후반에 충무공 이순신이 전사하면서 일시적으로 그의 역할을 대행(代行)하기도 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전사한 이억기처럼 왕실종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