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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매미372
젊은매미37223.05.31

조선시대 중기때 숙종은 어떤 업적이 있나요

조선중기때부터 조선은 외세의 침략과 당파싸움으로 나라가 많이 힘들었던것으로 알고 있는데 숙종은 어떤 압적이 있고 어떤 왕이 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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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31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의 제19대 임금이자 경종, 영조, 연령군의 아버지. 조선왕조에서 대대로 이어지던 장남의 수난이라는 불운을 깨부순 유일무이한 임금이다.[5]

    몸이 병약했던 13~14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다. 당시 조선은 15세가 되면 성년으로 보았다. 왕족이면 보다 빨리 후사를 보길 바라는 마음에 10세~12세에 조혼을 시켰지만 손(孫)이 급하지 않은 일반 양가집이면 15세 정도에 결혼을 시켰고 과거에 응시해 과거에 합격하면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20세가 되면 이제 완전한 성년으로 보아 아버지도 20살이 된 아들의 집안일에 관여하면 큰 실례로 여겼다. 숙종은 14세(만 13세)여서 조선의 기준으로도 아직은 성인이 되기 전이었다.

    당시 모후인 명성왕후와 증조모인 장렬왕후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수렴청정이 가능했지만 숙종은 즉위하자마자 어머니의 수렴청정을 건너뛰고 곧바로 권력을 장악하여 친정(親政)을 했다. 이는 조선 왕조에서 매우 특이한 경우에 해당한다. 이는 정통성을 떠나, 숙종의 총명함과 결단력이 왕가의 어른들과 조정의 대신들에게도 모두 인정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숙종은 다혈질이고 냉혹했으며, 장장 46년에 이르는 치세 동안 무수한 환국 정치를 통해 매우 강력한 왕권을 향유했던 중흥 군주이다. 숙종은 왕비를 네 번 들였고, 이 중 두 번째 왕비가 인현왕후 민씨, 세 번째가 희빈 장씨이다.

    집권 기간 동안 정사를 멀리하고 희빈 장씨를 비롯한 많은 여인들을 탐닉했던 국왕이라는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실제 숙종은 후궁의 수가 다른 조선의 임금에 비해서 적었으며 자식도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숙종이 여자와 관련한 문제가 가득한 임금으로 인식되는 이유는 그가 다른 국왕과 달리 정치적 사건의 해법으로 자신의 부인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출처: 나무위키 숙종(조선)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숙종은 환국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방법으로 붕당 내의 대립을 촉발시켜 신하들 간의 정쟁이 격화될수록 그와 동시에 왕권을 강화시켜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유도하였으며, 환국정치를 통해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민생 안정과 경제 발전에 상당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대동법의 전국 시행

    광해군때부터 시행되어 조금씩 지역적으로 확대되던 대동법은 숙종때 이르러 전국적으로 시행됩니다.

    국방 강화

    북한산성과 문수산성 등을 비롯한 수도권 지역의 산성을 축성하는 등 수도권 방어에 힘썼습니다.

    추증과 복권

    과거사 정리에 힘썼는데, 무인정사로 죽은 이방번과 이방석, 증조 할아버지가 사사시킨 민회빈 강씨, 공정왕이라 불리우는 정종과 노산군이었던 단종을 추증하거나 복권시켰습니다.

    상평통보 유통

    농업과 상업이 발전함에 따라 전국적으로 화폐인 상평통보가 유통되어 화폐경제가 정착화되었습니다.

    국경 명확화

    청나라와의 백두산 정계비와 안용복의 활약으로 울릉도가 작구 영토라는 것을 확정시켰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숙종의 등극과 환국 정치
    숙종 시대는 조선 왕조를 통틀어 당파간의 정쟁이 가장 심했던 기간이다. 그
    러나 숙종은 비상한 정치 능력을 발휘하여 왕권을 회복하고 사회를 안정시켰
    다. 따라서 숙종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계속되던 사회 혼란을 수습하
    고 민생을 안정시켜 조선 사회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왕으로 평가된다. 하
    지만 중전과 후궁들에 대한 애증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 해 숱한 옥사를 유발
    하여 치세에 흠을 남기기도 했다.숙종 대는 대신들 사이의 정쟁이 격화되었지만 왕권은 상대적으로
    강화되어 임진왜란 이후 지속되던 사회 체제 전반의 정비 및 복구 작업이
    거의 종료되었다고 할 만한 치적을 남길 수 있었다. 이 같은 환국 정치로 왕
    권을 강화시키며 조선을 안정시켰습니다

    숙종의 업적
    1. 경상도와 황해도까지 대동법 실시하여 그 적용 범위를 전국으로 확대시킴.
    2. 양전 사업을 계속 추진하여 서북지방 일부를 제외하고 전국에 실시.
    3. 화폐 주조 사업을 본격화하여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통용케 하여 조선후기
    의 상업 발달과 사회 경제적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침.
    4. 대흥산성, 황룡산성 등 변경 지역에 성을 쌓고, 대대적인 도성 수리 공사.
    5. 이유의 건의에 따라 북한산성을 총체적으로 개축하여 남한산성과 함께 서
    울 수비의 양대 거점으로 삼음.
    6. 훈련별대와 정초청을 통합하여 금위영을 신설하고 5군영 체제를 확립하여
    임진왜란 이후 계속 추진하던 군제 개편 작업을 끝마침.
    7. 양역이정청을 설치하여 민폐의 첫 번째 요인이던 양역 문제의 해결을 꾀해
    군포 균역절목이 마련되어 이전에는 양정 1인의 군포 부담이 1필에서 4필
    까지 심한 차이를 보이던 것이 2필로 균일화됨으로써 민간의 부담을 줄임.
    8. 사군이 설치되었다 폐쇄되었던 폐사 군지에 다시 2진을 설치하고 고토회복
    운동을 벌여 1712년 청나라와 협상하여 정계비를 세워 영토의 경계선 확정
    9.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여 막부 정권을 상대로 협상을 벌여 왜인의 울릉도
    출입 금지를 보장받음으로써 울릉도 귀속 문제를 확정지음.
    10. 명분 의리론이 크게 성행해 명에 대한 은공을 갚는다는 의미로 대보단이
    세워지고 성삼문 등 사육신이 복관되었으며 노산군을 복위시켜 묘호를 단
    종으로 올렸다. 그리고 폐위되어 서인이 되었던 소현세자 빈 강씨를 복위
    시켜 민회빈으로 하는 등 왕권 강화 측면에서 왕실의 충역 관계를 재정립.
    11. \"선원계보\" \"대명례집\" \"열조수교\" \"북관지\" 등이 편찬되고 \"대전속록\" \"신
    증동국여지승람\" \"신전자초방\" 등이 간행됨.


    등입니다. 많이 기네요.
    숙종은 흔히 두여자의 일로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내면속에는 강력한 왕권강화라는 것을 이룩한 왕이죠
    비상한 왕이라고도 볼수 있다는거죠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왕의 치세 기간은 조선 중기이래 계속되어 온 붕당정치(朋黨政治)가 절정에 이르면서 한편으로 그 파행적 운영으로 말미암아 당폐(黨弊)가 심화되고 붕당 정치 자체의 파탄이 일어나던 시기였습니다. 이때의 정국 형세를 살펴보면, 왕의 즉위 초는 앞서 현종 말년 예론(禮論)에서의 승리로 남인이 득세하고 있었으나 1680년 허견(許堅)의 역모와 관련,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였습니다. 1689년 희빈장씨(禧嬪張氏)가 낳은 왕자(후일의 경종)에 대한 세자 책봉 문제가 빌미가 되어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 정권이 다시 들어섰습니다. 그러다가 1694년 남옥(濫獄)이 문제되고 폐출되었던 민비(閔妃)의 복위를 계기로 남인은 정계에서 완전히 거세되었습니다. 그 대신 이미 노론 · 소론으로 분열되어 있던 서인이 재집권하는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연속적인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 뒤에도 노론 · 소론 사이의 불안한 연정(聯政) 형태가 지속되다가 다시 1716년 노론 일색의 정권이 갖춰지면서 소론에 대한 정치적 박해가 나타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잦은 정권 교체와 함께 복제(服制)에서 송시열(宋時烈)의 오례 문제(誤禮問題)를 둘러싼 고묘논란(告廟論難), 김석주(金錫胄) · 김만기 · 민정중(閔鼎重) 등 외척 세력의 권력 장악과 정탐 정치에 대한 사류(士類)의 공격에서 비롯된 임술삼고변(壬戌三告變) 공방, 존명의리(尊明義理)와 북벌론(北伐論)의 허실을 둘러싼 노론 · 소론 사이의 명분 논쟁, 민비의 폐출에서 야기된 왕과 신료(臣僚)들간의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송시열 · 윤증(尹拯) 간의 대립에서 야기된 회니시비(懷尼是非), 왕세자와 왕자(후일의 영조)를 각기 지지하는 소론 · 노론의 분쟁과 대결 등 역사상에 저명한 정치 쟁점으로 인해 당파간의 정쟁은 전대(前代)에 비할 수 없으리만큼 격심하였습니다. 남인이 청남(淸南) · 탁남(濁南)으로, 서인 역시 노론 · 소론으로, 그리고 노론이 다시 화당(花黨) · 낙당(駱黨) · 파당(坡黨)으로 분립하는 등 당파내의 이합 집산이 무성하였습니다. 이러는 와중에 윤휴(尹鑴) · 허적(許積) · 이원정(李元楨) · 송시열 · 김수항(金壽恒) · 박태보(朴泰輔) 등 당대의 명사들이 죽음을 당하는 화를 입었습니다.


    정쟁 격화는 붕당정치의 말폐가 폭발하면서 나타난 현상이기는 하나, 한편으로는 앞서 현종 때의 예송논쟁으로 손상된 왕실의 권위와 상대적으로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려 한 왕의 정국운영 방식의 결과이기도 하였습니다. 왕은 군주의 고유 권한인 용사출척권(用捨黜陟權)을 행사, 환국(換局)의 방법에 따라 정권을 교체, 붕당내의 대립을 촉발시키고 군주에 대한 충성을 유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의 치세 기간 신료 사이의 정쟁은 격화되었지만, 왕권은 도리어 강화되어 임진왜란 이후 계속되어 온 사회 체제 전반의 복구정비 작업이 거의 종료되면서 상당한 치적을 남겼습니다.


    우선 경제적인 면을 보면, 대동법(大同法)을 경상도(1677)와 황해도(1717)에까지 실시하여 그 적용 범위를 전국에까지 확대시킴으로써 선조 말년이래 계속된 사업을 일단 완성하였습니다. 또 전정(田政)에 있어서 광해군 때의 황해개량(黃海改量)에서 시작된 양전사업(量田事業)을 계속 추진, 강원도(1709)와 삼남 지방(1720)에 실시함으로써 서북 지역의 일부를 제외하고 전국에 걸친 양전을 사실상 종결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하는 상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주전(鑄錢)을 본격화하여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상평청 · 호조 · 공조 및 훈련도감 · 총융청의 군영과 개성부, 평안 · 전라 · 경상 감영에서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 통용하게 하였습니다. 왕의 치세 기간에 이루어진 이러한 경제 시책은 조선 후기의 상업 발달과 사회 경제적 발전에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다음 대외적인 특별한 긴장 관계는 없었지만, 국방과 군역 문제에서도 여러 가지 조처가 취해졌습니다. 먼저 대흥산성(大興山城) · 황룡산성(黃龍山城) 등 변경 지역에 성을 쌓고 도성을 크게 수리하였습니다. 특히 영의정 이유(李濡)의 건의에 따라 1712년 북한산성을 대대적으로 개축, 남한산성과 함께 서울 수비의 양대 거점으로 삼게 하였습니다. 또한 효종 대 이래 논란을 거듭하던 훈련별대(訓鍊別隊)와 정초청(精抄廳)을 통합하여 금위영(禁衛營)을 신설, 5군영체제를 확립하였습니다. 이로써 임진왜란 이후로 계속된 군제 개편이 사실상 완료되었습니다. 당시 민폐의 제1요인이던 양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호포제(戶布制) 실시를 한때 추진하다가 양반층의 반대로 좌절되자 그 대신 1703년 양역이정청(良役釐正廳)을 설치, 양역변통의 방안을 강구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이듬해 군포균역절목(軍布均役節目)을 마련하여 1필에서 3, 4필까지 심한 차이를 보이는 양정(良丁)주7 1인의 군포 부담을 일률적으로 2필로 균일화하였습니다.


    대외 관계로는 일찍부터 종래의 폐사군지(廢四郡地)에 관심을 보여 무창(茂昌) · 자성(慈城) 2진(鎭)을 설치, 옛 땅의 회복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인의 압록강 연변 출입이 잦아졌는데 마침내 인삼 채취 사건을 발단으로 청나라와의 국경선 분쟁이 일어나 1712년 청나라 측과 협상, 정계비(定界碑)를 세웠습니다. 일본에는 1682년과 1711년 두 차례에 걸쳐 통신사를 파견, 수호를 닦고 왜관무역(倭館貿易)에 있어서 왜은(倭銀: 六星銀) 사용의 조례(條例)를 확정지었습니다. 특히 막부(幕府)를 통하여 왜인의 울릉도 출입 금지를 보장받아 울릉도의 귀속 문제를 확실히 하였습니다.


    정치적으로 명분의리론이 크게 성행하여 명나라에 대한 은공을 갚는다는 뜻으로 대보단(大報壇)이 세워지고,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이 복관되었습니다. 또 노산군(魯山君)을 복위시켜 단종으로 묘호를 올리고,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으로서 폐서인(廢庶人)되었던 강씨를 복위시켜 민회빈(愍懷嬪)으로 하는 등 주로 왕실의 충역 관계를 왕권 강화 측면에서 재정립하는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300여 개소의 서원 사우가 건립되고 131개소가 사액되는 남설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 또, 이 시기에는 『선원계보(璿源系譜)』 · 『대명집례(大明集禮)』 · 『열조수교(列朝受敎)』 · 『북관지(北關誌)』 등이 편찬되었으며, 『대전속록(大典續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 등이 간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