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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한태양새227
클래식한태양새22723.05.19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은 사이가 왜 좋지않았나요?

흥선대원군은 어렸을때 부터 명성황후를 알고지내면서 황후로 책봉을 했던것 아니었나요? 둘의 사이는 왜 그렇게 나빠지게 된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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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원군의 초기 개혁 중에 가장 혁신적인 두 가지 사항은 첫째, 세정개혁(稅政改革)이었습니다.

    종래 상민에게만 부과했던 군포를 '호포(戶布)' 라 개칭하여 양반에게 확대시켜 부과한 것 입니다이것은 국가 재정을 충실하게한 과감한 조치였습니다.

    두번 째, 개혁이 바로 서원(書院)의 철폐이었습니다.

    당시 서원은 많은 전지(田地)를 보유하고 노비를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면세는 물론이고 면역의 특권을 갖고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경제적으로도 국가의 통제가 미치지 못하는 지방 유생들의 아성이 되었던 것 입니다. 따라서 이런 치외법권 지역을 그대로 방치하고서는 국가의 통제력을 바로 세울 수 없다는 것이 대원군의 판단이었습니다.

    대원군은 송시열의 뜻에 따라 세운 만동묘(萬東廟)의 철폐(1865년)를 시작으로 서원에도 납세의 의무를 지우고, 47개소 이외의 모든 서원을 철폐하였습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과감한 대개혁이었습니다.

    그러나 전통 깊은 유교 사회에서 대원군의 이 같은 혁명적 조치는 지방 양반과 유생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가장 큰 잘못은 대원군이나 당시 집권층이 국제정세를 인식하는 눈이 없어서 이런 좋은 개혁도 조선의 망국을 막지 못했습니다.

    대원군의 개혁은 세정개혁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종래 상민에게만 부과하던 군포를 호포(戶布)라 게칭하여 양반에게 확대 부과했습니다. 이것은 국가 재정의 충실을 기하기 위한 과감한 개혁이었습니다. 이어 1865년 왕실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경복궁 중건(重建)에 나섰는데, 국가의 재정 상태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여기서 농민들에게 결두전(結頭錢)과 도성 출입물품에 문세(門稅)와 같은 일종의 통과세도 물렸습니다.그리고 조선을 망국의 길로 가게한 원납전(願納錢)을 거두고 그것도 모자라 당백전(當百錢)이라는 악화(惡貨)를 주조한 것이 가장 큰 실정이었습니다.

    대원군의 개혁 중 가장 과감하게 잘한 것은 서원(書院)의 철폐입니다. 당시 서원은 려말(麗末) 사찰의 횡포보다 더 심해 서원은 많은 전지(田地)와 노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면세,면역의 특권을 누리는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이었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그대로 방치하고는 국가의 통제력을 바로 세울 수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은 오늘날 어떤 지도자의 무모한 대운하 역사와 같은 맥락일 수도 있다고 걱정합니다.

    대원군은 국내문제에 여념한 탓도 있었지만 당시 국제정세에 대한 식견이 전혀 없었다는 것 입니다.

    당시 흥선 대원군도 청나라가 아편전쟁으로 곤경에 빠진 것을 우니나라에 왜구들의 횡포 수준으로 인식하였습니다.

    그리고 대원군의 부인이 천주교 신자라 그도 서양인들의 힘이나 천주교도들에게 어느 정도 미련을 가졌으나, 대원군이 황해도 장연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프랑스 신부 베루느를 불러 프랑스의 힘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프랑스 신부가 정치와 종교는 별개라는 답을 하여 대원군은 남종삼과 베루느 신부 등 수 천 명을 처단했습니다. 그러니 참 역사는 한 순간에 좌.우와 상.하가 바뀌어 쇄국과 함께 병인양요로 이어진 것 입니다.

    그렇게 한 번 내질른 헛 발로 대원군은 돌아올 수 없는 쇄국의 강을 건넌 것 입니다.

    대원군은 5척이 조금 넘는 작은 키에 호탕한 성품을 지닌 호걸이었습니다. 조선에서 40년 동안 선교활동을 한 헐버트(Hormer B. Hulbert)도 이와 비슷한 기록을 남겼고, 1894년 겨울에서 1897년 봄까지 네 번이나 조선의 여러 지방을 답사했다는 영국인 여행가 비숍(Isabella B. Bishop)여사 등 많은 서양인들도 대개 비슷한 표현을 하였습니다.

    명성황후는 우리 조선이 500년 역사의 종말을 보는 마지막 비극이며 恨스런 사건의 여주인공입니다. 그녀는 민비로 조선을 마지막 구하려는 작은 방파재로 몸을 던졌다가 시아버지 흥선 대원군으로부터 임오군란 때 죽임을 당할 뻔 했고, 그녀의 명석한 두뇌로 淸나라와 일본, 그리고 러시아의 주변 3국을 이용하여 나라를 지키려다 결국은 힘의 논리로 희생된 비운의 여인입니다.

    그녀의 한계나 흥선 대원군의 모자람은 누구를 원망할 수 없는 우리 민족의 당시 무능함 입니다.

    대원군도 정조의 죽음 이후로 안동 김씨들의 세도정치로 나라가 피폐된 것을 구하려고 외척들의 세도정치의 뿌리를 끊고, 왕권 회복을 위해 경복궁을 重建하려다 나라의 재원을 탕진하여 당시 대원군이 국제정세를 몰라 쇄국정치라는 惡手를 두었습니다. 대원군도 초기에 쇄국을 하려고 하지는 안했으나 內治의 한계로 그리 택했습니다.

    민비도 처음에는 자기가 세도정치의 모순을 막기 위해 택함을 받은 시아버지 대원군과 맞서려고 생각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첫아이의 죽음 이후로 원수관계가 되고 또 그 때 임오군란 수습후 조선조정의 한계를 느껴 초기에는 청에 의지하였으나, 淸日戰爭에서 청이 패한 후 여러 사건 이후 일본을 견제할 세력이 러시아라는 믿음으로 친러 정책을 썼습니다.

    이 대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확보햇지만,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은 직후 곧바로 러시아.프랑스.독일의 3국 간섭을 받았습니다. 이 때 조선 정부 내에서는 일본의 침략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관계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습니다.

    일본은 친러 세력의 중심에 민비가 있다고 판단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공사관직원들과 일본군 수비대원 및 일본 낭인을 동원하여 1895년 10월 8일에 이른바 명성황후 시해사건인 암호명 '여우사냥'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한심한 조선 조정은 고종을 포함해 어떤 대책도 모 세우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俄館播遷이라는 대책 밖에 못세웠습니다.

    우리는 지금 친일파 논쟁 같은 한심한 짓거리를 하는데, 자기나라 왕비가 저렇게 능욕 당하고도 총 한 방 쏘며 일본을 응징도 못하는 우리 과거사를 반성해야지 누가 누구를 단죄합니까?

    사실 자기 며느리인 민비를 시해하도록 묵인한 대원군도 정말 파렴치한 老慾의 인물이며, 당시 고종의 그런 무능은 고종 개인 뿐 아니라 당시 관리들 전부 입니다.

    한 여인이 그리 무서웠으면 일본, 저 쳐죽일 일본이 민비 시해를 주도했습니까? 그리고 그 결과 어느 한 군인이나 의병도 나서서 응징을 하지 않은 슬픈 우리 역사에 명성황후의 그 노래를 들응 뿐 입니다. 이제 지금도 우리는 일본을 칠 힘이 없다는 것 이 한스러울 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