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무신 양규는 누구인지 궁금합니다.
양규는 고려시대 무신으로 알고 있는데요.
양규는 어떠한 인물인지 궁금합니다.
어떠한 업적이 있어서 지금까지 이름을 알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어떠한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는지 답변 부탁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거란이 고려를 침입하였을 때 흥화진에서 적을 무찌르고 포로가 된 고려 백성들을 구해냈으며, 1013년 거란이 다시 침입하자 김숙홍과 함께 출전하여 곽주에서 적을 대파하였습니다. 그 후 애수진에서 적을 격퇴시켰으나, 안주에서 돌아오던 중 부하 장수의 배신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양규의 죽음 이후, 현종은 그의 공을 인정하여 공부상서로 추증하였으며, 그의 아내 홍씨에게 조서를 내리는 등 높은 예우와 대우를 해주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양규는 거란의 침입 당시 큰 활약을 한 인물입니다. 1010년 거란의 성종이 이끄는 군대에게 흥화진이 포위되었을 때, 진사 정성, 부사 이수화 등과 함께 완강히 저항하였습니다. 이후 곽주를 공격하여 적을 몰아내고, 성안의 남녀 약 7000명을 통주로 이동하게 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양규는 고려시대의 무신으로 거란의 성종 군사에게 흥화진이 포위되자 완강히 저항하다 무로대·이수·석령·여리참 등에서 기습해 잡혀가는 백성 1만여 명을 구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009년 강조의 정변으로 으로 목종이 폐위 당하고, 젊은 현종이 옹립되자 그걸 명분으로 삼아 거란 황제 야율융서가 40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고려에 쳐들어왔는데 이 무렵 양규는 도순검사(都巡檢使)가 되어 흥화진사 정성, 흥화진부사 이수화, 판관 잔호 등과 함께 3천 명의 병력으로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런데 양규의 전임 도순검사가 바로 목종을 폐위시킨 강조 였는데 양규는 강조의 후임으로 흥화진에 부임한 것인데 아무래도 정변 직후의 군 인사는 민감한 사안이었던 만큼 강조의 추천이나 승인없이는 이 요충지에 강조의 후임으로 부임하기는 어려웠을 공산이 크다고 할수 있는데 이때문에 양규는 어떤 형태로든 강조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양규는 고려 전기 형부낭중, 도순검사, 공부상서 등을 역임한 무신 입니다.
목종 때 형부낭중이 되며, 1010년 거란의 성종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흥화진을 포위하자 도순검사가 되어 진사 정성과 부사 이수화, 판관 장호 등과 더불어 성을 굳게 지키며 완강히 저항하고 항복 권유를 물리쳤습니다.
이에 거란군은 포위를 풀고 통주에서 강조가 이끄는 고려의 주력부대를 격파한 뒤 남진, 거란군은 이때 사로잡은 노전을 흥화진에 보내 항복을 권하나 오히려 노전을 사로잡고 성을 굳게 지킵니다. 그 뒤 군사 700여 명을 거느리고 흥화진을 출발해 통주에서 강조의 부하였던 병사 1000여 명을 수습해 곽주에 머무르고 있던 거란병 6000여 명을 공격해 성을 탈환하고 성 안에 있던 남녀 7000여 명을 통주로 옮기게 됩니다.
1011년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이 나주까지 피란 갔으나 거란군과 철병교섭이 성공해 거란군이 물러가게 되었고 이에 양규는 구주방면으로 돌아가는 거란군을 지키고 있다가 무로대에서 2000여 명을 베고 포로가 되었던 남녀 2000여 명을 탈환, 석령에 이르러 다시 2500여 명을 베고 포로가 된 1000여 명을 탈환합니다.
여리참에서 싸워 1000여 명을 베고 포로가 된 1000여 명을 탈환, 다시 거란의 선봉과 애전에 싸워 1000여 명을 베었으며 이때 거란의 군사가 갑자기 몰려와 구주별장 김숙흥과 더불어 싸우나 남은 군사가 얼마 되지 않고 화살이 떨어져 진중에서 전사합니다.
그는 고군으로 한달 사이에 7차례 싸워 적을 6500명을 베고 포로가 된 백성 3만여명을 구했으며 낙타, 말, 병장기 등 노획물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획득하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시대 무신으로 거란 성종의 40만 대군에게 홍화진에서 포위되자 완강히 저항하다 무로대 이수 석령 여리참 등에서 기습하여 7전7승에 약 7000명을 사살하고 잡혀가는 백성 1만여명을 구하였습니다. 이어 애전에서 적을 기습하여 1000여명을 베었으나 대군의 공격을 받아 김숙홍과 함께 전사하였습니다. 삼한후벽상공신에 추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