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쌈박한재칼208
쌈박한재칼20823.02.17

전봉준 장군의 업적에 대해 소개해 주세요.

전봉준 장군의 업적에 대해 자세히 소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봉준 장군은 어떠한 활동을 통해 국가에 도움이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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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2.17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1855~1895녀사이에 활동했던 조선 말기 동학농민운동 지도자입니다 1893년 12월 고부군수 조병갑이 만석보 축조 이유로 농민들의 금전과 곡식을 강탈하자, 농민대표와 함께 바른 정치를 해주도록 호소하였으나 거부당하여 1894년 1월 농민과 동학교도들을 이끌고 부패한 관리를 잡아 가두었습니다

    그 후 전주에 입성하여 외침으로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부패한 관리 처벌, 노비의 해방 등 폐정개혁안 12개 조목을 실천하기로 약속받고 진정하였으나 약속이 이행되지 않고,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우리 나라에 침략의 손길을 뻗치자 12만 명의 군사를 지휘하고 손병희의 10만 군사와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전봉준의 업적으로 정리하자면 동학군을 이끌고 정부의 부정부패를 시정하려고 했고, 농민과 백성의 입장에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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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전봉준은 동학농민운동을 주도한 인물입니다.

    아래는 어린이백과의 내용입니다.

    전봉준은 양반으로 태어났지만 가난했기 때문에 농민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했어요. 농사를 짓는 한편,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면서 근근이 생활했어요. 그래서 전봉준은 못된 관리들과 외국의 침입으로 고통 받는 농민들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지요. 특히 전봉준이 살았던 마을인 고부는 군수의 횡포가 심했어요.

    “농민들을 괴롭히는 군수를 몰아내야 한다!”

    전봉준은 농민들을 모아 고부 관아로 쳐들어갔어요. 이것이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이었지요.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전봉준은 농민군 총대장이 되었어요.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키가 작아 녹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전봉준을 녹두장군이라고 불렀지요.

    [네이버 지식백과] 전봉준 [全琫準] (지도로 배우는 우리나라 우리고장 - 충청 · 전라 · 제주, 2009.07.30, 양대승, 유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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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전봉준은 1855(철종6)~ 1895(고종32) 사이에 활동 했던 조선 말기 동학농민운동 지도자입니다. 본관은 천안, 자는 명좌 초명은 전철로 불렸으며 호는 해몽, 벌명은 전영준으로 불리던 그는 어린시절부터 왜소한 몸 때문에 녹두라는 호칭으로 사람들에게 많이 불리기 시작했고 이후에는 그의 업적을 높이 여기며 녹두장군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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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 녹두장군 전봉준은 1892년 고부군수 조병갑이 만석보 축조 이유로 농민들의 금전과 곡식을 강탈하자, 농민대표와 함께 바른 정치를 해주도록 호소하였으나 거부당하여 1894년 1월 농민과 동학교도들을 이끌고 부패한 관리를 잡아 가두었다.


    2. 그 후 전주에 입성하여 외침으로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부패한 관리 처벌, 노비의 해방 등 폐정개혁안 12개 조목을 실천하기로 약속받고 진정하였으나 약속이 이행되지 않고,


    3.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우리 나라에 침략의 손길을 뻗치자 12만 명의 군사를 지휘하고 손병희의 10만 군사와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다.


    4. 동학 농민군은 중·남부 전지역과 함경남도, 평안남도까지 세력을 폈으나 싸움에서 패한 후 후퇴하여


    5. 금구ㆍ원평을 거쳐 정읍에 피신하였다가 순창에서 지난날의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넘겨져 서울로 압송되고, 재판을 받은 뒤 1895년 3월 처형되었다.



    전봉준의 업적으로 정리하자면 동학군을 이끌고 정부의 부정부패를 시정하려고 했고, 농민과 백성의 입장에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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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봉준은 1892년 고부군수 조병갑이 만석보 축조 이유로 농민들의 금전과 곡식을 강탈하자, 농민대표와 함께 바른 정치를 해주도록 호소하였으나 거부당하여 1894년 1월 농민과 동학교도들을 이끌고 부패한 관리를 잡아 가두었는데 그 후 전주에 입성하여 외침으로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부패한 관리 처벌, 노비의 해방 등 폐정개혁안 12개조목을 실천하기로 약속받고 진정하였으나 약속이 이행되지 않고 청,일 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우리나라에 침략의 손길을 뻗치자 12만명의 군사를 지휘하고 손병희의 10만 군사와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동학 농민군은 중, 남부 전지역과 함경남고, 평안남도까지 세력을 폈으나 싸움에서 패한 후 후퇴하여 금구, 원평을 거쳐 정읍에 피신하다 순창에서 지난날의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일본군에 넘겨져 서울로 압송되고 재판을 받은 뒤 1895년 3월 처형되었습니다.

    즉, 동학군을 이끌고 정부의 부정부패를 시정하려 했고 농민과 백성의 입장에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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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봉준 장군은 1890년대 초 한 때 흥선대원군 문하의 식객으로 있었지요 1894년 2월 15일 고부에서 탐관오리인 고부군수 조병갑을 몰아내고 1차봉기를 시도하였으나 조정의 회유책으로 해산했다가 3월 안핵사로 파견된 이용대가 동학농민군을 도적으로 규정하여 동비라 칭한뒤 동학군과 협력자를 처벌, 처형하고 관련 없는 농민들까지 동비로 몰아 처단하자 다시 봉기를 일으켰지요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의 남접을 지휘하였으며 거사 과정에서 흥선대원군과도 내통하여 연결을 시도했고 전라북도 태인 출생으로 오늘날의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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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화령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봉준 장군은 1855(철종 6)∼1895(고종 32)

    조선 말기 동학농민운동 지도자로 동학농민군대장을 맡았던 인물입니다.

    몸이 왜소하였기 때문에 흔히 녹두(綠豆)라 불렸고, 뒷날 녹두장군이란 별명이 생겼다. 출생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고창군 죽림리 당촌이 유력합니다.


    항상 말하기를 “크게 되지 않으면 차라리 멸족(滅族)되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1890년(고종 27)경인 35세 전후에 동학에 입교, 그 뒤 얼마 안 되어 동학의 제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接主)로 임명되었습니다.

    동학에 입교하게 된 동기는 스스로가 말하고 있듯이, 동학은 경천수심(敬天守心)의 도(道)로, 충효를 근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보국안민(輔國安民)하기 위하여서였다고 합니다.


    동학을 사회 개혁의 지도 원리로 인식하고 농민의 입장에서 동학교도와 농민을 결합시킴으로써 농민운동을 지도해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1893년 12월 농민들은 동학접주 전봉준을 장두(狀頭: 여러 사람이 서명한 소장의 첫머리에 이름을 적는 사람)로 삼아 관아에 가서 조병갑에게 진정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이에 동지 20명을 규합하여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하고 거사할 것을 맹약, 드디어 이듬해인 1894년 정월 10일 1,000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하였고 이것이 고부민란입니다.

    농민군이 고부 관아를 습격하자 조병갑은 전주로 도망, 고부읍을 점령한 농민군은 무기고를 파괴하여 무장하고 불법으로 빼앗겼던 세곡(稅穀)을 창고에서 꺼내 농민들에게 돌려 주었습니다.


    1894년 4월 4일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부안을 점령하고, 전주를 향하여 진격중 황토현(黃土峴)에서 영군(營軍)을 대파하고, 이어서 정읍·흥덕·고창을 석권하고 파죽지세로 무장에 진입, 이곳을 완전히 장악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전봉준은 창의문을 발표하여 동학농민이 봉기하게 된 뜻을 재천명하였고, 4월 12일에서 4월 17일 사이에는 영광·함평·무안 일대에 진격하고, 4월 24일에는 드디어 장성을 출발, 4월 27일에는 전주성을점령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청일전쟁이 일어나 사태는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고 마침내 9월 중순을 전후하여 동학농민군은 항일구국의 기치 아래 다시 봉기하였습니다.

    여기에 전봉준 휘하의 10만여 명의 남접농민군과 최시형을 받들고 있던 손병희(孫秉熙)휘하의 10만 명의 북접농민군이 합세하여 논산에집결하였다는데 자신의 주력부대 1만여 명을 이끌고 공주를 공격하였으나 몇 차례의 전투를 거쳐 11월 초 우금치(牛金峙)싸움에서 대패하였고, 나머지 농민군도 금구(金溝)싸움을 마지막으로 일본군과 정부군에게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그 뒤 전라도 순천 및 황해·강원도에서 일부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였으나 모두 진압되자 후퇴하여 금구·원평(院坪)을 거쳐 정읍에 피신하였다가 순창에서 지난날의 부하였던 김경천(金敬天)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넘겨져 서울로 압송되고, 재판을 받은 뒤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궁금증에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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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봉준은 동학 농민 운동을 통해서 신식 무기에 대항하면서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수만 명의 무명 농민들과 동학교도들이 이 땅의 오늘을 만든 저항 정신을 뿌렸습니다. 사람은 신분과 성별, 나이를 뛰어넘어 인간은 평등하다는 놀라운 인간 사랑의 정신을 사람들에게 심어 놓게 만들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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