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
고려 초기 유학자로 최승로가 유명한데, 그의 사상이 자주적이란 이유는 무엇인가요?
고려 초기의 유학자인 최승로는 신라 6두품 출신입니다. 그런데 그의 유학 사상이 자주적이라고 하는데, 무슨 이유로 자주적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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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상훈 전문가입니다.
최승로는 고려 초기 문신으로 성종에게 시무 28조를 올려 정책에 대한 건의를 하였습니다.
시무 28조에서는 사회적 낭비를 일으키는 불교의 폐단을 없애고 민생에 대해 보살필 것, 대외 관계나 왕의 책무등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혔습니다.
이중에 11조를 살펴보면
예악(禮樂) · 시(詩) · 서(書)의 가르침과 군신(君臣) · 부자(父子) 간의 도리는 마땅히 중국을 본받음으로써 비루한 것을 개혁하고, 그 나머지 거마(車馬)나 의복의 제도는 그 지방의 풍속을 따라도 좋을 것이니, 사치와 검약이 적절하도록 하신다면 무작정 같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라고 하여 모화사상에서 탈피하여 자주적인 풍속을 따를 것을 주장했습니다.
1명 평가최승로는 신라 6두품 출신으로 부친과 함께 고려 왕건에게 귀부하여 고려 초기 5명의 국왕을 모신 관료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유학은 보수적, 사대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와 고려 초기 유학의 특징은 자주적, 주체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고려 건국 이후 국가 체제를 확립하고, 개혁을 위한 과정에서 자주적인 성향을 보였습니다. 예를 들어 시무 28조의 내용 가운데, 중국 문물을 맹목적으로 도입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풍속은 각기 다른 것이므로 모든 것을 것을 반드시 중국과 같이 할 필요는 없다."라고 피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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