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조는 고려 태조 왕건의 후손으로 어린 시절부터 용맹함과 지략을 갖춘 인재로 알려져 있었으며 특히 군사적인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러나 경종이 즉위한지 4년 만에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왕후의 아들 중에는 아직 어린 왕자들만 있었고 대신들은 왕건 집안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왕건의 사촌동생인 성종이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강조는 목종 시대에 일어난 정변을 주도하여 김치양 일파를 제거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이 과정에서 목종이 살해되고 자신도 결국 패배하여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강조의 가족들은 유배되거나 사형당하였으며 그의 이름은 역사 속에서 지워졌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고려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후 고려의 역사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목종 때 중추사우상시(中樞使右常侍)로서 서북면도순검사가 되었습니다. 목종이 대량원군을 천추태후와 김치양으로 부터 보호하려고 강조에게 도움을 요청해 출병하였으나 오히려 목종과 김치양을 제거하고, 천추태후를 유배보내고 대량원군으로 현종을 즉위시켰습니다.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1010년 거란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습니다. 강조는 통주(지금의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30만의 군사로 거란군에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고 사로 잡힙니다. 거란 황제 성종은 강조의 인품을 보고 자신의 신하가 되어 권력을 누리자는 제안을 권유했으나 강조는 끝끝내 거절하다 처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