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해군은 즉위 후 정세 변화에 따라 왕위를 위협할지도 모를 동복형 임해군과 유일한 적통 영창대군을 경계, 임해군이 불궤를 꾀했다는 죄목으로 진도로 귀양보내고 다시 교동으로 옮긴 뒤 대북파 정인홍, 이이첨 등이 임해군의 처형을 주장하자 이원익, 이항복 등 중신들의 반대에도 현감 이직에게 살해하게 합니다.
칠서지독을 일으키고, 이를 계기로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에 유해, 선왕의 유교칠신 중 재직자인 신흠, 박동량, 서성, 한준겸을 쫓아내며 영창대군의 처형이 주장되자 이이첨의 뜻을 받은 강화부사 정항이 8세의 어린 영창대군을 살해, 정원군의 아들 능창군 전을 교동에 금고했다가 살해합니다.
대비 김씨에 대해서도 계속 압박을 가하던 중 1617년 이르러 폐모론이 대두되며 영중추부사 이항복, 영의정 기자헌 및 정홍익, 김덕함 등이 반대하자 오히려 이들을 멀리 귀양보냅니다.
그 뒤 우의정 한효순의 발론을 계기로 대비 김씨의 존호를 폐하여 다만 서궁이라 칭하고 공봉을 감하고 조알을 중지시키며 그 뒤에도 실권을 행사한 이이첨은 1622년 12월 강원감사 백대형을 시켜 이위경 등과 함께 굿을 빙자해 경운궁에 들어가 대비를 시해하려 하나 영의정 박승종 등이 급히 이르러 추방해 실패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광해군의 폐모살제 등의 사건은 지금까지 대북파에 눌려 지대던 서인 일파에게 반동 투쟁의 구실을 주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