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개화 정책은 민씨 척족과 그 일파가 장악한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이들은 임오군란 후 흐트러진 군제(軍制) 개편에 주력하였고, 개화 자강 기구의 신설을 주도하며 청나라식 개화 정책을 주관하였다.
반면 개화당(開化黨)의 박영효(朴泳孝), 윤웅렬(尹雄烈)은 각각 광주‧북청에서 신식 군대를 양성하였고, 『한성순보(漢城旬報)』 발간과 치도 사업 등을 적극 추진하였다.
고종의 지지를 등에 업은 개화 사업들은 민씨 척족의 반발로 중단되었지만, 개화당 세력은 여전히 고종의 신임을 받는 가운데 외교, 정치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며 성장해 나가면서 민씨 척족 일파와 대립하였다.
개화당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주요 목표로 설정하였고, 완전한 자주국(自主國)을 이룩하고자 하였다. 이들의 반청 외교 노선은 자주 국체를 유지하려는 고종의 의도와 부합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위의 내용처럼 김옥균은 개화당 소속으로 급진주의 개혁파에 속합니다. 이들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외세의 간섭없는 완전한 자주국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