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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23.12.27

김춘추는 왜 성골이 아닌건지 이유가 알고싶습니다.

김춘추는 부모 모두 왕족출신인데 왜 김춘추는 성골이 아닌 진골인건가요?

그 이유에 대해 아시는 전문가님이 계시면 답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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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라 골품제에서 왕족은 성골과 진골로 구분하는데, 성골은 부계와 모계 모두 순수한 왕족이고, 진골은 한쪽만 왕족인 것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김춘추는 천명공주와 김용수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 성골이 되어야 할 혈통이지만 할아버지 진지왕이 폐위됨에 따라 김용수가 성골에서 진골로 강등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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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춘추 부모는 둘다 진골입니다.

    진골도 왕족이에요

    신라시대때의 기록은 남은게 거의 없어서 성/진을 나누는 정확한 기준을 알기 힘들지만

    삼국사기에 진덕여왕이 마지막 성골이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성골은 왕족중에서도 특수한 혈통만 되었고, 이 특수 혈통끼리 결혼해야 자식도 성골인데

    진덕여왕때 남자 성골이 전멸해서(아마 혼혈이 너무 되었던 거겠죠)

    후대부터는 진골이 왕이되는 상황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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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왕조는 크게 박혁거세로부터진덕여왕까지를 성골계열로 보고, 29대 태종무멸왕(김춘추 재위654∼661)으로부터 36대 혜공왕까지를 진골계열로 분류하였다. 37대 선덕왕이후부터는 실권에 의해 왕권이 좌우되어 사실상 혈통에 의한 왕위계승체제는 붕괴되고 만다.

    그리고 성골과 진골을 구분하는 기준에 대해,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은 부계와 모계가 모두 왕족일 경우를 성골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상하다, 무열왕의 아버지는 25대 진지왕의 손자였으며, 어머니는 26대 진평왕의 딸인 천명공주였다. 즉 김춘추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왕족이어서 성골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진골을 내세워 신왕조를 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신라왕조중 최초로 왕에 오른 박혁거세, 석탈해, 미추왕을 제외하곤 그 후손의 부계는 필연적으로 왕의 혈통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성골이냐 진골이냐의 문제는 부계가 아니라 모계의 혈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17대 내물왕이후부터 24대 진흥왕까지의 혼인을 살펴보면, 모계에 의한 왕위계승 문제가 더욱 확실하게 드러난다.

    우선 내물왕의 어머니는 김씨 휴례부인으로 확실한 성골정통이었다. 하지만 내물왕은 다소 늦은 나이에 자손을 보았고, 그에따라 왕권에 도전할 수 있는 가장 큰 정적인 실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성은 내물왕의 태자들이 어리다는 이유로 밀어내고 화백회의의 추대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또 이시기는 광개토대왕에서 장수왕으로 이어지는 고구려 최전성기어서, 고구려의 팽창과 군사적 위협도 왕위계승문제에 함께 작용하였다.
    비록 눌지는 실성왕으로부터 축출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오히려 고구려의 군사적 후원에 힘입어 실성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르는데 성공하였다.

    왕위쟁탈에 성공한 눌지왕은, 근친 동족혼을 통해 경주 김씨에 의한 성골왕위 계승을 보다 확고히 하여 나갔으며, 21대 자비왕에 이르기까지 친족혼이 이루어 질 수 있었다. 하지만 22대 지증왕에서 부터 23대 법흥왕 그리고 24대 진흥왕대에 이르기까지 박씨 계열이 왕비를 배출하고 외척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런데 진흥왕의 경우는 앞선 두 왕의 경우와 조금다르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법흥왕이 자손없이 사망하여, 그 동생의 아들이 왕위에 오른 경우이다. 비록 박씨는 이번엔도 왕비를 배출하였지만, 왕이 어리다는 이유로 태후가 섭정을 담당하였는데, 그녀는 법흥왕의 딸이었다.
    즉 권력실세가 박씨에서 김씨로 넘어가는 시점이었던 것이다. 또한 진흥왕은 태자 동륜의 비로 김씨 만호부인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태자 동륜은 이른 나이로 사망하고 만다. 그리고 태자 동륜에게 아들 백정이 있었음에도, 백정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사륜이 왕위에 올라 진지왕이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복잡한 왕위계승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진지왕의 어머니는 사도부인 박씨로 혈통이 분명하지만, 그 비는 기오공의 딸 지도부인이라고만 나와있어 혈통이 분명하지않다.
    개인적으로 볼 떄 진흥왕이 박씨 외척세력을 배제하려 하자, 둘째 왕자인 사륜에게 접근하여 세력만회를 꾀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진평왕이 김씨 마야부인을 비로 맞아들였을 때도, 박씨 계열은 진평왕의 동생 국반에게 월명부인을 비로 보냈던 일도 연계해서 고려해 봐야 한다.

    그러나 진흥왕의 적손을 밀어내고 왕위에 오른 진지왕은 처음부터 왕권이 불안정하였으며, 결국 재위 4년만에 화백회의의 결의에 따라 폐위되고 만다. 그리고 진지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진평왕은 마야부인 김씨를 비로 맞아 왕권의 안정을 꾀하였으며, 서기 579년에서 632년까지 53년이란 긴 재위기간을 갖는다. 하지만 이런 진평왕에게도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바로 왕위를 이를 아들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에비해 진지왕 계열은 진지왕 - 용춘 - 문흥(추봉왕호, 김춘추의 아버지) 으로 이어지는 안정된 후계구도를 이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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