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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한키위191
넉넉한키위19123.06.21

과거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실크로드를 어떠한 나라가 만든건가요?

과거 실크로드를 통해서 유럽과 아시아가 무역의 항로였다고 들엇는데요.

그렇다면 이러한 실크로드는 어떠한 국가가 주도적으로 건설한건지 그리고 어떠한 시기에 가장 번성한건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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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21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실크로드는 동서양을 이어 준 기원전 고속도로라 할 수 있습니다.

    실크로드는 비단길이라는 의미입니다.

    어느나라에서 만든 길이라기보다는 동서양의 무역이 이루어진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방에서 서방으로 간 대표적 상품이 중국산의 비단이었던 데에서 유래하는데 서방으로부터도 보석·옥·직물 등의 산물이나 불교·이슬람교 등도 이 길을 통하여 동아시아에 전해졌습니다. 통상로에는 타클라마칸사막의 북변을 통과하는 서역북도와, 남변을 경유하는 서역남도가 있습니다. 똑같이 파미르 고원을 넘어 서투르키스탄의 시장에 이르며, 또한 동방으로는 간쑤성 둔황에서 합해져 외길로 되어 황허강 유역까지 이르렀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비단길(Silk Road)이라고 일컫는 실크로드는 고대 중국과 서역 각국 간에 비단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무역을 하면서 정치ㆍ경제ㆍ문화를 이어 준 교통로의 총칭이다. 총길이 6,400㎞에 달하는 실크로드라는 이름은 독일인 지리학자 리히트호펜(Richthofen, 1833~ 1905)이 처음 사용했다. 중국 중원(中原) 지방에서 시작하여 허시후이랑(河西回廊)을 가로질러 타클라마칸 사막(Taklamakan Desert)의 남북 가장자리를 따라 파미르(Pamir) 고원, 중앙아시아 초원, 이란 고원을 지나 지중해 동안과 북안에 이르는 길이다.


    옛날 로마인들은 동쪽 어딘가에 황금 섬(중국)이 있다고 믿었고, 중국 또한 서역에 대해 항상 궁금해 했다. 그러나 정작 동양과 서양은 BC 100년까지도 서로 간에 교류가 없었다. 이러한 교류를 가로막고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타클라마칸 사막과 파미르 고원과 같은 자연 장애물과 아랍인들의 방해 때문이다.


    실크로드가 처음 열린 것은 전한(前漢: BC 206~AD 25) 때이다. 한 무제(武帝)는 대월지(大月氏), 오손(鳥孫)과 같은 나라와 연합하여 중국 북방 변경 지대를 위협하고 있던 흉노를 제압하고 서아시아로 통하는 교통로를 확보하길 원했다. BC 139년 장건(張騫)은 100여 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장안을 떠났지만 얼마 가지 못해 흉노에게 붙잡히고 만다. 그는 그곳에서 약 10년 동안 허송세월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통역인 깐후(甘父)와 탈출하여 파미르 고원 너머에 있는 페르가나(Fergana)국을 거쳐 당초 목적지인 대월지국(大月支國)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많은 세월이 흘러 대월지국은 동맹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대월지국에 머무는 1년 동안 여러 가지 자료를 수집한 후 본국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장건이 서역으로 갈 때는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 길을 이용했지만 돌아 올 때는 그 남쪽 길을 택했다. 도중에 티베트족에게 붙잡혀 1년 동안 고생하기도 했지만 BC 126년에 돌아왔다. 대월지국과 동맹을 맺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의 경험과 자료가 워낙 중요하기 때문에 한 무제는 치하 했다고 한다.

    한 무제는 장건의 귀국 보고를 아주 흥미롭게 생각하였다. 서역에는 명마가 있고, 금은전을 사용하는 나라가 있고, 중국(한)의 특산품인 칠기와 비단을 사고 싶어 하는 나라도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대월지, 강거, 오손 등 군사력이 강한 유목 민족들을 흡수해서 한나라를 세계의 강국으로 끌어 올리고 싶어 했다. 당시 중국과 서역 사이에 낀 간쑤성(甘肅省)은 흉노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장건은 그들을 피해 쓰촨성(四川省), 윈난성(雲南省)을 거쳐 인도로 가는 길을 개척하고자 했다. 그래서 부하들을 여러 차례 보냈지만 모두가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장건은 흉노족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오손을 이주시키려고 직접 부하 300명을 이끌고 오손(wuson)으로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한나라로 돌아 온 장건은 이듬해인 BC 114년에 죽고 말았다.


    한 무제는 BC 104년부터 101년까지 페르가나국에 군사를 보내어 왕의 목을 치고, 남북실크로드의 중요한 길목에 자리한 누란(樓蘭)도 정복하였다. 마침내 BC 60년에는 흉노마저 굴복시킴으로서 서역을 완전히 손에 넣게 되었다. 이때부터 중국의 비단은 본격적으로 로마까지 팔려 나갔다.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 기린, 사자와 같은 진귀한 동물과 호마(胡馬: 말), 호두, 후추, 호마(胡麻: 깨) 등이 전해졌고, 유리 만드는 기술도 전해졌다.


    중국에서는 비단, 칠기, 도자기같은 물품과 양잠, 화약 기술, 제지 기술 등이 서역으로 건너갔는데, 특히 종이 만드는 기술이 서역으로 건너가서 중세 유럽의 암흑기를 밝혀 인쇄술 발달과 지식 보급에 원동력이 되었다. 이후 둔황(敦煌)을 비롯한 4군데에 요새를 세워 장사 길을 보호했는데, 이때부터 서역으로 통하는 실크로드가 훤히 뚫렸으며 1년에 5~10번씩 장사꾼들이 오갔다.


    장건이 서역을 처음 개척한 이래 중국의 역대 왕조는 중앙아시아 및 서아시아 여러 나라와 빈번히 교류하였다. 그러므로 실크로드는 상업적인 면뿐만 아니라 동서 문화의 교류라는 면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한편 많은 스님들이 경전을 구하러 실크로드를 따라 인도로 들어갔고, 인도의 승려들도 경전을 가지고 중국에 많이 들어왔다. 그러므로 중국 불교가 발전하게 된 데에는 인도와 중국을 연결시켜준 실크로드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실크로드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당대(唐代: 618~907)였는데, 현재는 파키스탄과 중국의 신장웨이우얼 자치구(新疆維吳爾自治區)를 잇는 포장도로에 일부 남아 있다고 한다.

    출처 : 대단한 지구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