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담배가 언제 들어왔나요?
예전부터 담배가 들어온 이유가 뭐가 있나요?
그리고 맨 처음 수입하게 된 계기가 어떻게 되죠? 우리나라에 담배가 언제 들어왔나요?
안녕하세요. 끈질긴매미39입니다.
대도시로 유통되었다. 지방에서는 장시를 통해서, 서울에서는 담배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연초전(煙草廛)이나 담뱃잎을 썰어서 판매하는 절초전(折草廛), 담뱃대와 재떨이를 판매하는 연죽전(煙竹廛) 등의 상가를 통해서 일반 소비자에게 판매되었다.
지방의 소상인이나 보부상은 연초 산지를 돌아다니면서 적은 양을 사서 대도시의 장시에 가져가 비싼 값에 판매하였다. 그리고 비교적 자금이 풍부한 거상(巨商)들은 담배 산지에서 직접 많은 양을 사서 객주나 여객을 통해 대도시와 군사 요충지 등에서 비싼 값에 소비자에게 판매하였다. 지방에서도 인구가 밀집해 있는 대도시에서는 담 배를 판매하는 상점이 있어 전매권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충청도의 큰 포구였던 강경(江景)에도 남초전(南草廛)이 있었고, 평양에도 절초전이 있었다. 경상 우수영이 있는 고성(固城)의 남문 밖에 있었던 남초전에서는 영남 상인 수백 명이 모여 담배를 매매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임원경제지』에는 전국 지방의 비교적 규모가 큰 325개의 장시 가운데 181곳에서 담배를 거래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경기도 18개, 호서 23개, 호남 15개, 영남 45개, 관동 4개, 해서 22개, 관서 41개, 관북 13개 장시가 그것이다. 이러한 비율은 담배가 곡물류, 직물, 소금의 뒤를 이어 가장 많이 거래되는 품목임을 말해 준다.
서울에서는 종로 육의전(六矣廛)을 중심으로 금난전권(禁亂廛權)이 형성되어 있었다. 정부는 대외적으로 중국 사신에게 줄 담배의 지속적인 공급과 국내 담배를 수집하는 기관이 필요하였다. 당시 중국 사신에게 주던 담배는 왜지삼(倭枝三)과 진안과 삼등에서 생산된 진삼초가 주를 이루었다. 왜지삼은 담배를 잘게 썰어 만든 것으로 당시 일본에서 수입해 들어온 고급 담배였다. 그리하여 정부는 이들을 지속적으로 국가에 납품할 수 있는 매개체가 필요하였다. 이를 만족시켰던 것이 연초전이다. 비록 육의전의 하나로 들어가 있지는 않지만 연초전은 왜지삼과 진삼초를 국역(國役)으로 부담하는 대신 담배 공급과 판매에 대한 독점권을 얻었다. 그리하여 지방 산지에서 담배를 매입한 향상(鄕商)으로부터 상품을 공급받아 서울에 거주하는 소비자들에게 판매하여 이익을 취하였다. 연초전 외에 절초전도 있었으나 판매권을 둘러싸고 연초전과 빚은 갈등 때문에 1742년(영조 18)에 완전 폐지되었다. 나아가 연초 판매로 연초전 상인의 이익이 늘어나자 일부 양반과 재력이 있는 사람이 담배 유통 체계에 뛰어들었다. 이른바 사상들이 등장하여 시전과 대립하게 된 것이다. 다음과 같은 정조 때 기록은 이러한 현상을 자세하게 보여 주고 있다.
서울에 사는 이씨 성을 가진 양반이 지방에서 절초와 남초를 널리 사들여 서울에 들어와 난매(亂賣)하고 있고, 부민(富民) 이덕신(李德臣)이라는 사람도 매년 지방에서 절초를 널리 사들여 감추어 두었다가 난매하니 각별히 엄금해 주십시오.63)
담배 판매 이익이 다른 상품에 비해 컸기 때문에 이익을 탐하는 각종 세력이 이 상품의 매매에 뛰어들면서 시전 상인들의 특권은 위협받게 되었다. 나아가 18세기 말에는 각 도에서 가져온 담배 거래를 알선해 주고 구문(口文)을 받거나 도고(都賈)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등장하였는데 이들을 남초 여객 주인(南草旅客主人)이라 하였다.
결국 서울에서의 담배 유통은 남초전의 시전 상인과 사상, 그리고 남초 여객 주인 등이 경쟁적으로 담당하였다. 이러던 것이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사상의 힘이 시전 상인을 능가하게 되어 시장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연초전과 남초 여객 주인은 사상의 거래를 인정하고 보호해 주면서 대가로 구문을 받는 신세로 쇠퇴하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친근한코요테32입니다. 담배의 유래가 엄청 오래전 부터있었습니다만 가장 오래된 문헌에 의하면 1614년에 이수광이 펴낸 지봉유설 이라고 되어있으니 그전이나 그때부터이지 않을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