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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23.03.14

조선시대 상언격쟁이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조선시대에 있던 상언격쟁이란 무엇인지 궁금하고, 이것이 생기게된 시대적 배경이 궁금합니다.

상언격쟁이 실제로 잘 활용이 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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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3.14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신문고와 같은 제도인데 절차가 복잡해서

    실제로 잘 활용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상언은 사전적으로 백성이 임금에게 글월을 올린다는 뜻으로,

    규정에 의하면 한문으로 쓰여진 문서의 형태로 당사자가 직접 작성하고 직접 바치고

    정해진 기한 내에 직접 나와 본인이 상언했는가의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를 밟아야 했습니다.

    이처럼 상언은 한문으로 작성해야 했으므로 문자에 익숙하지 못한 일반 백성들에게는 작성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위의 내용에서 보듯이 일반 백성이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보이는 제도인 것 같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상언(上言)과 격쟁(擊錚)은 백성들의 억울하고 원통한 사정을 국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합법적인 소원제도(訴?制度)이다. 상소(上疏)가 사회 전반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에 비해 상언과 격쟁은 주로 개인적인 사정을 소원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실행주체는 개인인 경우가 많지만 집단인 경우도 있는데, 집단일 경우를 등소(等訴)라 합니다. 상언은 사전적으로 백성이 임금에게 글월을 올린다는 뜻으로, 규정에 의하면 한문으로 쓰여진 문서의 형태로 당사자가 직접 작성하고 직접 바치고 정해진 기한 내에 직접 나와 본인이 상언했는가의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를 밟아야 했습니다. 이처럼 상언은 한문으로 작성해야 했으므로 문자에 익숙하지 못한 일반 백성들에게는 작성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상언은 문자에 익숙한 관원, 생원, 진사, 유생, 양반부인,잡직관인 등의 양반과 중인이 주로 하였다. 상언은 두 차례로 한정하였으며, 승정원에서 내용에 따라 뷴류한 후 각방 승지에게 넘기면 이들이 검토한 후 자신의 의견을 첨부하여 국왕에게 올렸다. 격쟁은 임금에게 하소연하기 위해 임금이 거둥하는 길가에서 징 꽹가리를 쳐 하문(下問)을 기다리는 형태의 소원수단이다. 따라서 격쟁은 문자에 익숙지 못한 이들도 참여 할 수 있어 하층 세력인 양인(良人), 소사(召史), 역민(驛民), 승려, 노비 등 평민과 천민이 선호하였다. 규정에 따라 격쟁인을 먼저 붙잡아 형장(刑杖)으로 때린 후 형조에서 그 내용을 구두로 조사하여 국왕에게 간단하게 요지를 써서 올렸다. 상언과 달리 격쟁은 횟수에 제한이 없었으며 외람된 내용도 빠짐없이 보고되었다. 상언과 격쟁은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해 각사에서 접수한 이후 3일 내에 국왕에게 상주해야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상언격쟁 (문화원형백과 화성의궤, 2002.,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상언과 격쟁은 국왕에게 호소한다는

    점에서 일치하지만,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상언은 문서로 작성하여 정소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문자 생활에 익숙한 사대부들이

    선호하였다. 정소인이 국왕의 행차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미리 작성해서

    준비한 상언을 상언별감(上言別監)에게 제출하면, 승정원(承政院)에서 국왕에게 보고한 후 정소 내용에 따 라 담당

    관청으로 이관하여 조사 검토하고

    국왕에게 보고하였다.

    -출처: 우리역사넷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상건경재는 조선시대에 관직을 맡을 관리를 선발하고 임명하는 과정을 일컫는 용어이다.

    조선시대에는 과거제도가 관료를 뽑는 주된 방법이었습니다. 상언격쟁은 선발 과정의 마지막 단계였기 때문에 이 시스템의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이 과정에는 후보자의 자격, 성격 및 정부 서비스에 대한 적합성을 결정하는 능력이 포함되었습니다.

    검사는 공정하고 외부 영향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외딴 곳, 종종 산정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응시자는 며칠 동안 전시관에 머물러야 했으며, 그 동안 심사관은 응시자를 면밀히 관찰하고 평가했습니다.

    상언격쟁은 매우 권위 있는 행사로 여겨졌고, 시험에 합격하는 것은 큰 영광이었습니다. 합격자는 직급에 따라 관직에 임명되었으며, 최고 순위의 후보자가 가장 고위직에 임명되었습니다.

    요컨대 상언격쟁은 먼 곳에서 심사·심사·임용의 엄격한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관리를 뽑는 조선시대 과거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상언과 격쟁은 조선시대 일반 백성들이 '합법적'으로 국왕에게 직접 민원을 제기하는 제도를 말한다고 합니다. '상언'은 백성이 임금에게 글월을 올리는 것으로, 규정에 의하면 한문으로 쓰여진 문서의 형태로 당사자가 직접 작성하고 직접 바치고 정해진 기한 내에 직접 나와 본인이 상언했는가의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를 밟아야 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상언은 한문으로 작성해야 했으므로 문자에 익숙하지 못한 일반 백성들에게는 작성에 한계가 있었지요. 따라서 상언은 문자에 익숙한 관원, 생원, 진사, 유생, 양반부인,잡직관인 등의 양반과 중인이 주로 하였다고 합니다.

    '격쟁'은 일반 백성이 궁에 들어가거나, 임금의 외부행차 시 징이나 꽹과리를 쳐 직접적으로 왕에게 자신의 사연을 고하는 것입니다. 글을 올려 자신의 민원을 제기하는 것을 상언(上言)이라 하였고, 행차시에 해당 상언을 수리하는 관리가 길가에서 민원을 걷어 이후 왕에게 올렸으며, 글을 모르는 일반 백성들은 꽹과 징을 올려 자신의 민원을 제기하였고 대기하고 있던 관리가 이를 받아 적었는데 이를 격쟁이라 했다고 합니다. 격쟁이 난잡해지고 사사로운 개인의 송사까지 궁에 들어와 격쟁을 거는 일이 빈발하자 철종떄는 왕의 행차 시에만 격쟁을 수리하도록 규정을 변경했다고 합니다.

    이들 제도는 그 원래 의미에 맞게 초기에는 운영 되었으나 점차 그 본래의의미가 퇴색 되어 갔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