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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조용한문어8024.02.04

소련 폭풍 작전은 무슨 작전이었는지 궁금합니다.

남한과 북한으로 한반도가 분단이 된 원인이 소련 폭풍 작전이라고 하는데요.

자칫 다시 세계 대전으로 번질 것을 우려하여 참 안한 걸로 알고 있었는데 소련이 6.25전쟁에 참전했던가요?

소련 폭풍 작전은 무엇이었는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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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5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4.02.05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폭풍작전이 무엇인지가 궁금하군요.

    폭풍 작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을 침공하기 위해 계획한 작전으로, 6.25 전쟁이 이 작전으로 인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작전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시작되었으며, 북위 38도 이북 일대에서 선전포고 없이 진행되었습니다. 대한민국 국군은 제대로 된 전투를 해보지도 못한 채 붕괴되었고, 공산군은 빠르게 서울을 향해 남하했다. 작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연방 양측에서 계획되었다. 더욱이 소련은 전차와 항공기 같은 지원 무기를 공산주의 동맹국에게 지원했습니다. 이 지원 무기로 공산군은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을 3일 만에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춘천, 옥계, 주문진, 대한해협 등지에서도 공산군이 대한민국 국군을 공격하였으나, 이 전투에서는 대한민국 국군이 승리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폭풍 작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 대한민국 을 침공하기 위해 계획한 작전으로, 6.25 전쟁 이 이 작전으로 인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 작전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시작되었으며, 북위 38도 이북 일대에서 선전포고 없이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남침을 시작한 것으로 김일성이 각 부대에 공격 개시를 명령하며 사용한 암호가 폭풍이어서 폭풍 작전이라 부릅니다.

    이러한 작전명령에 따라 10개 사단 20만 명에 이르는 북한 군이 서해의 옹진반도에서 동해의 양양에 이르는 38선의 11개 지역에서 동시에 기습적으로 남침을 해오면서 한국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1948년 남과 북에 각각 정부가 수립되어 분단이 현실화하자 북한의 김일성 정권은 곧바로 군사력 증강에 나서며 남침 준비에 착수, 1949년 3월 소련과 경제문화협정을 체결해 무기를 지원받았으며 8개 전방사단과 8개예비사단 규모의 군사력을 갖추는 것을 목표로 병력을 증강시켰습니다. 이를 배경으로 소련의 스탈린에게 남침 계획에 대한 승인을 요청하나 미국의 참전으로 전쟁이 확대 될 것을 우려한 스탈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49년 6월 주한미군이 철수하고, 10월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의 내전에서 승리해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면서 소련의 태도도 점차 변화하는데 1950년 1월 미국의 국무장관인 애치슨이 한반도를 미국의 극동 방어선에서 제외하자 스탈린은 3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에게 중국의 지원 약속을 받는 것을 전제로 남침을 승인해주게 됩니다.

    소련의 승인을 받은 김일성 정권은 1950년 4월부터 바실리예프 중장이 이끈 소련의 군사고문단과 함께 작전계획을 세우며 남침을 위한 준비를 본격화했고 5월 김일성이 직접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에게서 미국이 참전하면 병력을 파견해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폭풍 작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을 침공하기 위해 계획한 작전으로, 6.25 전쟁이 이 작전으로 인해 시작되었습니다. 작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연방 양측에서 계획되었습니다. 더욱이 소련은 전차와 항공기 같은 지원 무기를 공산주의 동맹국에게 지원했습니다. 이 지원 무기로 공산군은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을 3일 만에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폭풍작전은 독일과 소련의 전쟁중 1942년

    12월 12일부터 23일까지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 지휘 하에 벌어진 작전으로 스탈린그라드에 펼쳐진 독일 6군에 대한 포위망의 돌파를 목표로 벌어진 혈전이었으나, 최종적으로는

    실패로 끝나고 말면서 동부전선의 향방을

    갈라놓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마지막을 알린 작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