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사건은 한국 내외에서 어떻게 대응되었나요?
1970년대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사건은 한국 내외에서 어떻게 대응되었나요? 국내외 정부, 인권단체, 국제사회 등이 이 사건에 대해 취한 조치와 반응을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사건에 대해 대한민국 경찰은 표면상 의문의 세력에게 납치당한 자국 국민 김대중을 위해 수사를 하는 척 하긴 했으나 사실상 수사 은폐로 가닥을 잡고 진행, 애초에 경찰이 뭘 어떻게 할수도없는 게 세상 사람들 전부가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납치 사건임을 아는 상황이었고 서슬퍼런 유신체제에 대통령 측근을 일개 경찰들이 조사할수 있을리 없었습니다.
사건 직후 박정희에 의해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했으나 말 그대로 표면적 조치에 불과, 수사 본수는 아무런 성과없이 1년 후인 1974년 8월 14일에 내사 중지, 다시 1년 후 1975년 7월 21일 내사 종결하며 그대로 묻혔습니다. 수사본부가 작성한 당시 수사자료를 보면 엄청난 수사범위를 수사한 것으로 되어있지만 정작 찾은 증거는 없었고 당시 수사본부 부본부장이었던 당시 마포경찰서장 이흥세는 실제로 수사본부가 한수사는 형식상의 서류조사밖에 없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당시 여당인 공화당은 사건이 김대중의 자작극이 아니냐는 주장을 했으며 이에 대해 신민당 정일형 의원은 국회에서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에게 사건에 대해 질문하면서 무엇 때문에 한 정권이 개인을 상대로 하여 이토록 심한 피해망상증에 걸려있는지 알수없다며 강하게 비판하다 이에 항의하는 여당 의원들과 몸싸움을 벌였고 그 과정에 부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박정희 정권에 의한 유신체제가 선포되자 국내로 들어오는 것을 포기하고 1973년 7월 재미교포 반 체제단체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약칭 한민통을 결성하는 등 해외에서 반유신 활동을 전개하였다고 합니다. 경과 도쿄에서 ‘한민통’ 결성을 며칠 앞둔 1973년 8월 8일, 통일당 당수 양일동을 만나러 그랜드팔레스 호텔로 간 김대중은 괴한들에 의해 납치되었습니다. 이후 선박 용금호에 감금된 채 동해로 강제 압송되었다가, 5일만에 8월 13일서울의 자택 부근에서 풀려났다고 합니다. 납치사건 직후 한국교포 초등학생이 닉슨 당시 미 대통령에 보낸 탄원서가 있을 정도로 당시 재외 한인들은 김대중 대통령 석방에 관해 미국의 협조를 요청 했고 미국도 박정희 정권에게 압력을 행사 한것으로 보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