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정승은 정말로 청백리가 아니였던것이었나요?
얼마전에 들은얘기인데요, 황희정승은 우리가 생각하는 청백리가 아니였다고 하더라구요, 근데 황희정승은 정말로 우리가 생각하는 청백리가 아니였었나요? 혹시 역사적으로 기록된 사실이 있는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유병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다들 황희 하면, 검은소와 누렁소 일화를 기억하면서 매우 선하고 어진 이미지로 알고 있습니다만...청백리와는 어울리지않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야사나 실록에 그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한편으로는 태종의 굳건한 신임을 받았으며, 세종때 중용받았던 사실로 보아, 그의 업무능력만큼은 인정받을만한 인물이었지만, 권력을 이용한 비리를 저질렀다는 기록이 심심챦게 남아있는것으로 보아,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완벽한 청백리는 아니었다 봅니다.
오히려, 청백리에 가장 어울리는 위인은 아무래도 오리 이원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실록이면 실록, 야사면 야사... 어느 이야기를 들어도 흠잡을곳을 찾기 힘든 인물..
특히, 영의정까지 지낸 사람이, 지붕에 비가 새고 무너져내릴 위험이 있다는 주변신하들의 보고가 인조에게 올라가자, 인조가 보다못해 집을 지어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청백리로 이름올렸던 이들중, 집이 누추하다는 이유로 왕이 집을 지어준 사례는 이원익이 유일한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황의 정승은 관료 생활만 50년을 하고 영의정을 18년간 해온 사람 입니다. 기록에 보면 그는 매우 가난해서 매일 끼니 걱정을 해야 할 정도 였다고라고 하는데 그건 과장된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으로 따지면 공무원 생활을 50년을 하고 18년간 국무 총리를 한 사람이 그렇게 가난하게 생활 했을 리도 없고 그렇다고 자기가 받을 것을 남을 위해 다 기부 하지 않았다면 말이지요. 그럼 왜 이러한 말들이 나왔는지를 살펴 보면 당시 명나라는 재상 제도를 폐하는 분위기 였습니다. 즉 왕의 권위에 매번 도전 한다는 것이 그 이유 였습니다. 당시 조선도 정승 제도를 명나라 처럼 폐할지도 모른다는 소문도 돌았습니다. 그래서 영의정이였던 황희는 무엇인가 자신의 청렴 하다는 것을 입증하면서도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한 명분이 필요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의 청백리가 더 강조 되었고 사실 보다 더 과장 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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