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네 사육신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 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1456년 6월, 단종의 복위를 꽤하다 역적으로 몰려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과 함께 참혹한 최후를 맞이한 박팽년의 가족들은 역적의 가족이라 하여 이조판서로 있던 아버지 박중림을 비롯한 동생 인년, 대년, 연년 4형제와 아들 헌(憲), 순(珣), 분(奮) 3형제 등 남자 9명은 극형에 처해지고 부인들은 공신들의 노비로 끌려가거나 관비가 되었는데 이때 둘째 며느리 성주이씨의 친정아버지 이철근이 달성 현감으로 있었기에 마침 경북 달성군 하빈면 묘리의 친정동네와 인접해 있는 대구 관비로 갈 수 있어 그나마 행운이었고 이 시대에 남자들은 엄격한 국법을 시행했지만 아녀자들에 대해서는 다소 관대한 처분이 이루어졌고 형식상 노비 신분이어도 생활에는 다소 여유가 있었다 합니다.박팽년의 둘째 며느리는 이때 배속에 아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아들을 낳으면 죽이고 딸을 낳으면 관비로 삼으라는 세조의 어명이 이미 내려져 있었는데 그해 늦가을 드디어 아기가 태어났고 아들이었는데 어명에 따라 관가에 고(告)하면 아들은 죽게 되고 박팽년 가문은 영원히 문을 닫게 될 처지였지만 때마침 여종이 비슷한 시기에 딸을 낳았고 아이를 서로 바꿔치기 해서 이렇게 손자를 노비로 위장하여 박팽년의 혈통은 묘골의 외조부에 의해서 키워졌고 종의 자식이라는 뜻의 박비(朴婢)라는 이름으로 그 질긴 목숨을 이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