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에 관해서 질문드립니다. 효종은 어떻게 형 소현세자의 자리를 차지했나요?
조선시대 병자호란에 관해서 질문드립니다. 효종은 어떻게 형 소현세자의 자리를 차지했나요? 워낙, 소문도 자자하고 해서 정확한 답변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병자호란이 발생했을 때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습니다. 이후 소현세자가 먼저 조선으로 돌아왔지만, 인조 25년(1645년)에 갑자기 변사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효종이 조선으로 돌아와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인조가 승하하자 즉위하였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조유성 AFPK 입니다.
✅️ 소현세자가 청에서 볼모로 지내다가 귀국했는데,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아버지였던 인조의 강력한 주장으로 세손이었던 석철(경선군)이 아닌 소현세자의 동생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되게 되고, 후에 즉위하게 됩니다. (* 원래대로라면 석철이 후계자가 되었어야 함.)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소현세자는 귀국한지 얼마되지 않아 사망하였습니다. 세자가 죽고 인조는 주요 대신들을 소집하여 후사를 논의하였습니다.
당연히 신료들은 성리학적 명분론과 종법에 기초하여 세자의 아들이 차기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조는 "국유장군(國有長君)"을 내세우며 신료들의 의견에 반대했습니다.
국유장군이란, 국가에는 장성한 임금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인조는 태종이 양녕을 폐세자하고도 원손이 아닌 세종을 후사로 삼은 일과, 세조-예종-성종으로 이어지는 왕위승계를 거론하며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켰습니다.
인조가 이처럼 강경하게 둘째 아들을 세자로 세운 까닭은 청나라 때문이기도 합니다. 10살 짜리 원손을 세자의 책봉할 경우 청이 트집을 잡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세자가 죽은 지 얼마되지 않아 청의 사신들이 방문했습니다. 그들은 나이 어린 원손의 세자 승계에 우려를 표명하였습니다. 그러자 인조는 둘째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밝혔고, 청의 사신은 다행을 표했습니다.
따라서 인조가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까닭은, 나이 어린 원손보다 장성한 아들이 나았기 때문이며 또한 청나라의 개입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결과에 끝까지 반대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소현세자빈 강씨였습니다. 강씨와 그의 오라비들은 인조를 음해하는 저주 행위에 연관된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는 강빈이 사사되고, 소현세자의 자식들이 제주도로 옮겨지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해군 11년 능양군의 차남으로 태어났고, 친어머니는 인열왕후 한씨, 새어머니는 장렬왕후 조씨, 비는 우의정 장유의 딸 인선왕후 장씨였습니다.
인조 4년 8살 봉림대군에 봉해지고 병자호란 때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는데 볼모로 심양에 있는 동안 청나라가 산해관과 서역을 대대적으로 치려 할때 소현세자에게 동행을 요구하자 자신이 형인 세자를 대신하고 자처해 가겠다고 할 정도로 당시 세자 신분이었던 형을 지키려합니다.
인조 23년 5월 귀국했는데 그로부터 1개월 뒤 소현세자가 죽는 바람에 그의 뒤를 이어 세자에 책봉되며, 인조 27년 아버지 인조가 승하하자 다음날 창덕궁 인정문 앞에서 즉위하게 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병자호란 이후 1645년(인조23) 형인 소현세자가 그해 4월 갑자기 죽자 5월에 귀국합니다. 세자를 다시 책봉을 해야 하는데, 당시 대부분의 신하들은 소현세자의 아들 세손이 있었지만 인조가 국유장군론(國有長君論)을 내세워 세자로 책봉되게 됩니다. 처음에는 사양하였으나 결국 세자로 책봉되어 1649년 조선 17대 국왕 효종으로 즉위하였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묘호란 때의 약조를 지키지 않고 무리한 조공을 요구하면서 재차 침략해 온 것이 1636년 병자호란입니다. 인조는 제때 강화도로 피신하지 못하여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고 청나라는 남한산성을 둘러싸고 40여일 동안 외부와의 단절을 시킵니다. 한편으로는 삼남지방의 군과 의병을 막아세우고 강화도로 피신한 왕실가족들을 통해 항복을 권유하였습니다. 이에 결국 인조는 삼전도에 나와 삼배고구두의 치욕을 당하게 되고 소현세자와 세자비 봉림대군 삼학사인 윤집 오달제 홍익한 등이 볼 모로 청나라로 끌려가게 됩니다. 소현세자는 생각보다 청나라가 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선교사 아담 샬을 통해 서양세계를 알게됩니다. 소현세자는 쳥과 조선의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도모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반청주의자들에게 굴종적으로 보였고 청의ㅈ황실과 가깝게 지내다보니 인조는 왕의 자리를 빼앗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되면서 인조와 소현세자의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일반 백성 또한 인조의 삼전도 굴욕이 있었던 만큼 반청에 앞장서야 할 세자가 오히려 청과의 관계개선을 도모하는 모습에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결국 10여년 가까이를 볼모로 잡혀 있다가 귀국했으나 알 수 없는 병(독살 의심)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되었고 세자빈 또한 모함을 받아 출궁당하게 됩니다. 인조 이후에 왕위를 계승한 사람은 봉림대군으로 그가 효종입니다. 효종은 비밀리에 군사를 훈련시켜 치욕스러운 볼모생활을 갚아주겠다고 북벌론을 주장했으나 두 차례의 나선정벌(청의 요구에 따라 러시아의 남하를 차단하기 위한 파병)에 나서서 대승을 거뒀지만 그의 꿈인 북벌은 이루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효종 사후 북벌론은 흐지부지 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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