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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빙
비비빙23.06.17

고구려 백제 신라통역없이 대화가 통했나요?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통역없이 대화가 통했는지 우리나라말을 쓰는 나라가 또 어디에있었는지 우리나라 말에 대한 역사적 근거나 배경이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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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17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대의 삼국, 즉 고구려 · 백제 · 신라의 언어는 국어의 역사적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오늘날 남아 있는 적은 자료들이나마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어는 위에서 말한 부여계제어를 대표하는 것이요 신라어와 백제어는 한계제어를 대표하는 것인바, 여기에 가야어를 덧붙일 수 있다.

    오늘날 남아 있는 고구려의 언어자료는 우리나라와 중국 · 일본의 사적에 나오는 고유명사들이다. 그 중에서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地理志)는 그 주된 광원(鑛源)이다. 특히, 권37에는 하나의 고구려 지명에 대하여 음을 이용한 표기와 새김을 이용한 표기가 아울러 기록된 예들이 많아서 고구려의 어휘를 확인하기에 매우 좋은 조건을 제공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음표기의 일부분과 새김표기의 일부분 사이에 일정한 대응이 발견되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여러 지명에서 음표기의 ‘忽’과 새김표기의 ‘城’, 음표기의 ‘買’와 새김표기의 ‘川 · 水’가 대응됨을 보는데, 이 대응을 토대로 고구려에서 성을 의미한 단어는 ‘홀(忽)’과 비슷한 발음을, 내나 물을 의미한 단어는 ‘매(買)’와 비슷한 발음을 가졌음을 추정할 수가 있게 된다(‘忽’이나 ‘買’라는 한자가 고구려에서 어떻게 발음되었는지를 연구할 필요가 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방법에 의해서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얻을 수 있는 고구려어 단어는 80여 어에 달한다. 이 가운데 둘 이상의 지명에서 확인된 신빙성이 높은 것은 20여어에 지나지 않으며, 나머지는 오직 한 지명에서 얻어지는 것들이다. 그러나 한 지명에서만 보이는 대응이라 하여도 그 지명표기의 다른 부분이 신빙성이 있는 대응일 때에는 그 신빙성이 어느 정도 보장되기도 한다.


    고구려 단어들의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편의상 현대한자음으로 표기한다.). ① 달(山, 高), ② 단 · 탄 · 돈(谷), ③ 내 · 노 · 뇌(壤), ④ 바의 · 파의 · 파헤(巖, 峴), ⑤ 내미(池), ⑥ 어을(泉) 등으로, 이들 중에서 ②는 일본어의 tani(谷)와 발음이 비슷한 점이 눈에 띄며, ③은 남방퉁구스제어의 na(地), 중세국어의 ‘나랗(國)’와 비슷한 점이 주목된다. ④는 물론 중세국어의 ‘바회(巖)’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요, ⑤는 국어에서는 쉽게 확인되지 않으나 퉁구스제어의 namu, lamu(海)와 비슷한 점이 주목된다.


    ⑥은 신라어의 ‘을(井)’과 일치하는 점에서도 주목되지만, 고구려장군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이름이 『일본서기(日本書紀)』에 irikasumi(伊梨柯須彌)라 표기된 중의 iri(淵)와도 일치되는 점이 주목된다. 이 밖에 현존하는 고구려지명에서 몇 개의 수사(數詞)를 추정할 수가 있는데, ‘밀’(3), ‘우차’(5), ‘난은’(7), ‘덕’(10) 등이다. 이들은 『삼국사기』 권37의 다음 지명표기에서 얻을 수 있다. 三峴縣一云密波兮, 五谷郡一云弓次云忽, 七重縣一云難隱別, 十谷縣一云德頓忽(이 중 ‘弓次云’은 『세종실록』 지리지에 ‘于次呑’으로 되어 있어 그 잘못인 듯하다.).


    이 몇 개의 수사는 일본어의 수사와 비슷한 점이 주목된다. 이들은 고대 일본어로 mi(3), itu(5), nana(7), töwo(10) 등인데, 특히 ‘난은’(7)은 퉁구스제어의 nadan(7)과 일본어의 nana(7)의 중간형을 지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nadan에서 앞뒤의 n의 영향으로 d가 n으로 변한 것이 고구려어의 ‘난은(nanan)’이요, 여기서 마지막 n이 떨어진 것이 고대 일본어의 nana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수사는 교역이나 정복에 의해서 쉽게 전파될 수 있는 것이니, 고구려어와 일본어의 수사의 일치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신중하게 생각해 볼 문제라고 하겠다.


    지금까지의 연구를 종합해 보면, 고구려어는 중세국어(더 올라가면 신라어)와 가장 친근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일본어와도 매우 가까운 일면을 보여 준다. 앞에서 우리는 국어와 일본어의 비교연구가 정체상태에 부닥쳐 있음을 보았거니와, 고구려어와의 사이에 보여주는 이 일면은 의미가 큰 것으로 생각된다. 또 한편, 고구려어는 퉁구스제어와도 적지 않은 공통요소를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백제어에 대해서는 『양서(梁書)』 백제전(百濟傳)에 고구려어와 대체로 같다(言語服章 略與高句麗同)는 말이 보인다. 이것은 백제의 지배족의 언어에 관한 기술로 생각된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백제의 지배족은 부여족의 한 갈래였던 것이다. 그런데 백제의 피지배족은 마한의 언어를 사용했다고 본다면, 백제에서는 지배족의 언어와 피지배족의 언어가 상당히 달랐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주서(周書)』 이역전(異域傳) 백제조(百濟條)에 임금의 성은 부여씨(夫餘氏)로 ‘어라하(於羅瑕)’라 이름하는데, 백성들은 ‘건길지(鞬吉支)’라 부른다(王姓夫餘氏 號於羅瑕 民呼爲鞬吉支 夏言竝王也)고 한 것이 그러한 증거의 하나라고 해석되기도 하였다. 이 기록에 보이는 ‘건길지’의 ‘길지’는 『일본서기』에서 백제의 임금을 뜻하는 말로 사용된 kisi, 『광주판천자문(光州版千字文)』의 ‘王 긔ᄌᆞ왕’에 보이는 ‘긔ᄌᆞ’와 같은 단어인 듯하다. 이것은 신라어에서 임금을 의미한 ‘금’(님금의 금)과는 다른 점이 주목된다.


    백제어에 관한 주된 자료도 『삼국사기』 지리지인데, 여기서 얻을 수 있는 단어의 하나에 ‘긔(城)’가 있다(悅城縣本百濟悅己縣, 潔城郡本百濟結己郡). 이 단어는 『일본서기』에 kï로 나타난다. 위에서 고구려어의 단어 ‘홀(城)’을 보았으며, 신라어에서는 ‘잣(城)’이었음이 몇몇 자료에 의해서 확인된다. 이 신라어 단어는 일본어에 차용되어 sasi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렇게 볼 때 백제어에는 고구려어나 신라어와 다른 요소들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를 종합해볼 때, 백제어는 신라어와 공통적인 점이 많았음을 결론적으로 말할 수 있다.


    신라어의 중심은 오늘의 경주지방이었다. 이곳은 신라의 발상지였으며, 신라가 고대국가로 발전한 이후에도 줄곧 정치 · 문화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신라의 성장과정은 곧 그 언어의 팽창과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6세기에 있어서의 가야의 병합은 신라어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의 언어 통일 과정에 있어 최초의 큰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가야의 언어에 대해서는 기록이 적어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가령 『삼국사기』 권44에 가야어로는 문(門)을 ‘돌’(梁의 새김)이라 한다(加羅語謂門爲梁云)고 하였음을 보아 가야어가 신라어와 다른 점을 가지고 있었음이 옛날에도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가야지역의 옛 지명을 검토해 보면 다른 한(韓) 지역에서는 볼 수 없으며 오히려 고구려지역에서 발견되는 단어들이 더러 나타나 가야어가 북쪽 부여계의 언어들과 특수한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이 문제는 앞으로의 연구과제이다.


    어쨌든 6세기에 가야가 신라에 병합됨으로써 이 지역에도 신라어가 퍼지게 된 것이다. 그뒤 7세기 후반에 백제와 고구려가 이어 멸망하고, 신라의 판도가 이들의 고토(故土)에까지 확대되자 이로써 신라어 중심의 국어의 통일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통일신라의 성립은 역사상 국어 형성의 가장 큰 사건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중세국어가 신라어의 기반 위에 성립되게 된 것도 이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통일신라가 10세기초까지 계속되는 동안 경주 중심의 신라어의 영향은 점차 백제와 고구려의 고지(故地)에까지 파급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어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신라어와 큰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므로 그 고지의 언어상태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지만, 고구려어는 신라어와 상당한 차이가 있었으므로 그 고지의 언어상태에 대해서는 큰 문제가 된다.


    이에 대해서는 다시 논하겠지만, 고구려의 고지에도 신라어가 행해지게 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리하여 경주지방의 신라어가 드디어 우리나라의 유일한 언어로 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이탈리아반도에서 라티움(Latium)지방의 언어(라틴어)가 이웃에 있는 여러 다른 언어들을 소멸시키고 드디어 전 반도의 언어가 된 것과 비슷한 예이다. 경주는 바로 한반도의 라티움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전하는 신라어의 자료는 고구려어나 백제어의 자료보다는 풍부하나, 그 음운 · 문법 · 어휘에 관한 자세한 연구를 행하기에는 너무나 빈약하다. 그러나 빈약한 자료인 만큼 그것은 더욱 면밀히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신라어 자료 중 중요한 것으로는 『삼국유사』에 전하는 향가(鄕歌)와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인명 · 지명 · 관명 등과 금석문에 보이는 이두 등을 들 수가 있다.


    이러한 자료들의 검토를 통하여 국어학자들이 지금까지 신라어에 대해서 밝힌 것은 결코 적지 않다. 그 결론은 한마디로 말해서 신라어는 중세국어와 전반적인 일치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신라어와 중세국어의 비교는 우리로 하여금 중세국어가 신라어를 근간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게 한다. 신라어의 가장 중요한 자료는 향가인데, 지금까지의 향가 해독이 이렇다 할 방법론의 반성도 없이 중세국어에 전적으로 의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틀린 것이 아니었음은 신라어와 중세국어의 본질적인 일치에 말미암은 것이다.


    신라어 어휘에서 몇 예를 들면, ① 바ᄃᆞᆯ(海), ② 한(大), ③ 거츨(荒), ④ 믈(水), ⑤ 잋-(厭) 등과 같다. 이 중 ①은 음운변화를 거쳐 중세국어에 ‘바ᄅᆞᆯ(海)’이 되었으며, ⑤는 의미변화를 거쳐 중세국어에서 ‘피곤하다’의 뜻을 가지게 되었다. ② · ③ · ④는 중세국어와 완전히 일치한다. 신라어의 수사도 어느 정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몇 안 된다. 향가의 표기에 나타난 것으로는 1의 ‘ᄒᆞᄃᆞᆫ(一等, 一等隱)’, 2의 ‘두블(二肸)’, 1000의 ‘즈믄(千隱)’ 등이다. 이들 표기는 말음(末音)만을 나타내고 있으나, 각각 중세국어의 해당 수사와 일치함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즉, 1은 『계림유사(鷄林類事)』에 ‘ᄒᆞᄃᆞᆫ(河屯)’이라 보이며 이것이 ‘ᄒᆞᆫ’으로 변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2는 『계림유사』에 ‘두블(途孛)’이라 표기되어 있으며 이것이 나중에 ‘두을’로 변했다.


    이로써 일반 어휘와 수사에 있어서 중세국어가 신라어의 계통을 끄는 것임을 확실히 알 수 있거니와, 문법체계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사실이 확인된다. 그 가장 뚜렷한 예로 경어법(敬語法)을 들 수 있다. 신라어에는 존경법의 ‘시(賜)’, 겸양법의 ‘ᄉᆞᆲ(白)’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각각 중세국어의 ‘시’와 ‘ᄉᆞᆸ’ 등에 일치하는 것이다. 이 경어법은 알타이제어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그 발생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욱 연구가 요망된다.


    지금까지 행한 고대 삼국의 언어에 대한 검토의 토대 위에서 이들 언어의 상호관계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앞에서 우리는 부여계와 한계의 두 어군을 나누어보았는데, 이제 이들이 서로 친족관계에 있음을 결론지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부여계제어가 아직 분열되지 않은 단계로서 원시부여어를, 한계제어가 아직 분열되지 않은 단계로서 원시한어를 설정할 수 있으며, 이들이 다시 하나의 조어에서 갈려나왔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것을 부여한조어(夫餘韓祖語)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본래 한 언어에서 부여계와 한계의 두 갈래로 나뉘었으며, 이들 중에서 고구려어 · 백제어 · 신라어 등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들은 한 언어에서 나온 방언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의 차이는 현대국어의 방언들의 차이보다는 좀더 크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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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국시대의 각 나라 사람들은 통역 없이 의사 소통이 가능 했습니다. 그 이유는 고구려, 백제, 신라등은 당시 에도 다른 국가에 세작( 스파이)등을 파견해서 정세를 살폈는데 그 어디에도 의사 소통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삼국간의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고 판단 가능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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