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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좀합시다
그만좀합시다23.07.27

조선시대에 궁녀 선발 조건은 무엇이었나요?

조선시대에 궁녀를 뽑을 때 어떤 조건이 있었나요? 궁녀의 출신계급이나 나이같은 제한이 있었나요? 드라마에서보면 양인 이상의 궁녀들이 나오던데 궁녀는 양인신분에서 뽑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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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28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궁녀의 선발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중요한 위치이기 때문에 선발과정이나 절차가 다소 까다로웠던 것 같습니다.

    궁녀의 선발은 내명부의 소관이 원칙이었고, 국왕의 최종감독과 내명부 수뇌부의 지휘 하에 각 처소에서 궁녀선발을 담당했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임금이 직접 선발하는 친선(親選)이 있어, 세종실록에 따르면 하루에 30명씩 이틀간 60명을 경복궁 사정전에서 직접 심사했다고 합니다.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 따르면 연산군은 “각 관청의 노비와 사족 서녀 중에서 미모가 있어서 시녀가 되기에 합당한 50명을 뽑아 들여라. 내가 마땅히 따로 뽑을 것이다.”라는 전교를 내렸다고 합니다.

    서류심사를 통해 본인과 가족에게 문제가 없다 간주되면 상궁과 색장나인이 면접심사를 했고, 대화나 관찰 등등으로 됨됨이를 심사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숫처녀인지를 확인했는데, 아주 어린 경우에는 필요가 없었겠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있다고 간주되면 반드시 확인했다고 합니다. 구한말에는 13세 이상일 경우 확인했습니다. 앵무새의 생혈(生血)을 후보자의 팔목에 묻힐 때 묻으면 숫처녀라고 간주했습니다.
    문제없다고 간주되면 상궁이 합격자에게 입궁날짜를 가르쳐주고, 궁궐에서 치마저고리와 바지의 재료인 명주 1필을 지급했습니다. 입궐하는 날 궁궐에서는 소녀가 탈 가마를 보냈고 직속상관 앞으로 가 인사를 한 뒤 주의사항을 듣는 것으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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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kbs의 자료에 따르면 궁녀의 선발조건은 엄격했다고 하는데, 아래의 내용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궁녀는 누구보다 왕을 가까이에서 모셔야 했던 사람들로 무엇보다 왕의 여자가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어 그 어떤 관리들보다 선출 조건이 엄격했다. 조선 초에는 보통 13세 미만의 어린 여자 노비나 기첩 소생 등을 궁녀로 선발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양가집 규수들을 선발하려는 움직임이 많아졌다. 이에 양가집에서는 자신의 딸을 어린 나이에 궁녀로 뽑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조혼’을 일삼는 폐단까지 일삼았다. 이에 영조 때에는 양가의 딸을 궁녀로 뽑지 못하게 법까지 생길 정도였다.

    궁녀로 선발되고 나면 먼저 소속 부서를 배치하고, 다시 철저한 도제식 교육을 받는다. 도제식 교육은 궁중 법도는 물론 맡은 업무와 기타 교양을 쌓는 수련 과정까지 꼼꼼히 거쳐야 했다. 당시 궁녀들이 썼던 글씨 ‘궁체’에는 엄격한 교육과 통제된 생활 속에 살았던 궁녀들의 삶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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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초기에는 관청에 딸린 노비 가운데 조상과 친인척 중 죄인과 병력이 없는 집안의 아이를 선출했다고 하고, 조선 후기로 갈수록 중인 계급이나 낮은 벼슬아치들의 자녀 중에서 궁녀를 뽑았다고 합니다. 궁녀를 희망하는 소녀 중 10세 이상(어리게는 4세부터 궁에서 궁녀수업을 받는 이도 있었다 함)은 앵무새 피로 처녀성을 판단해 최종적으로 선발했다고 전해집니다.

    궁녀의 조건을 나열해보면,

    훗날 왕비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부모나 자신이 원한다고 해서 궁녀가 될 수 없었다고 합니다.

    1. 조상 중에 죄인이 없어야 한다.

    2. 식구 중 중병을 앓았다거나 장애를 가진 이가 없어야 한다.

    3. 용모가 뛰어나야 하고 품성이 좋아야 한다

    4. 처녀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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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궁녀의 선출은 원칙적으로 10년에 한번이었지만 예외도 있었다. 지밀나인의 경우 조건이 까다로와서 상궁들이 두세번씩 선을 보러 나갔다. 그러나 대개 연줄과 세습이라 할 수 있으며, 고모가 조카를 들여놓는 경우가 많았다.


    궁녀의 출신 계급은 지밀과 침방·수방은 중인 계급, 기타는 대개 상민 계급이었다. 입궁 연령은 지밀이 가장 어려 4∼8세, 침방·수방이 6∼13세, 그 밖은 12∼13세가 관례였다.


    궁녀는 입궁 후 15년이 되면 계례를 치르고 정식 나인이 되었다. 남색 치마에 옥색 저고리, 머리에는 개구리첩지를 단 제복이 일생 동안 그들의 복장이었다.


    나인이 된 뒤 다시 15년이 경과되면 상궁으로 승격했으므로, 가장 빠른 4∼5세 입궁을 기준으로 할 경우에 35세 이후라야 상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는데, 왕의 후궁이 되면 20대의 상궁도 있을 수 있었다. 이런 궁녀는 왕의 자녀를 낳기 전까지는 상궁의 신분에 머물러 있지만, 그 대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왕의 곁에서 시위만 하면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를 승은상궁(承恩尙宮)이라 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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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궁녀의 선발은 내명부의 소관으로 국왕의 최종감독과 내명부 수뇌부의 지휘 하에 각 처소에서 궁녀선발을 담당했습니다.

    조선 초기 임금이 직접 선발하는 친선이 있어 세종실록에 따르면 하루에 30명씩 이틀간 60명을 경복궁 사정전에서 직접 심했습니다.

    구한말 궁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궁녀를 고를 때 먼저 검토한 것이 가족이었는데 후보자의 가족 중 전과나 중환자가 있는지 확인, 가족 중 기생이 있으면 궁녀가 될수없습니다. 다음으로 개인을 확인하는데 종친부나 의정부의 공노비는 될수 없고, 관습법으로 성균관의 공노비도 금지되었습니다.

    관노비인 관기 또한 금지되었는데 여러 남자의 수청을 드는 여자를 왕의 여자로 삼는 것은 왕의 권위에 손상이 가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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