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양치를 어떻게 했나요?
안녕하세요. 현대에는 칫솔과 치약등 치아용품들이 다양하게 많은데요. 과거에는 이빨을 닦거나 청결하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양치를 했나요?
안녕하세요. 단단한노린재197입니다.
필자가 어렸을 때에는 아침에 일어나 우물가에 가서 세수를 하고 소금으로 이를 닦았다. 손가락에 소금을 조금 묻혀 이를 닦았다. 여름날 저녁에는 냇가에 가서 맑은 물에 멱도 감고 고운 모래로 이를 닦기도 하였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칫솔에 고급 치약을 짜서 양치질을 한다.
그러면 오랜 옛날에는 사람들이 이를 어떻게 닦았을까? 요즘처럼 칫솔이나 치약이 없어 이를 닦기가 불편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충치나 잇몸 질환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세조가 제주 안무사에게 명을 내려 난산과 안질, 치통을 치료할 수 있는 여의(女醫) 두세 명을 뽑아서 올리라 명한 기록이 있다.
또 성종 11년 7월 8일에 성종은 승정원에 하교한다.
"내가 치통을 앓은 지 해가 넘었는데 널리 의약을 시험하였으나 효력이 없다."
그러면서 명나라 사신에게 부탁해 약을 구하면 어떻겠냐고 신하들의 의견을 구했다. 그런데 도승지 김계창은,
"전하의 치통을 다른 나라 사람이 알게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답한다. 왕의 건강은 국비인 것이다.
이날 성종은 제주목사 허희에게 명을 내렸다.
"잇병을 고치는 의녀 장덕은 이미 죽고 이제 그 일을 아는 자가 없으니 이 · 눈 · 귀 등 여러 가지 아픈 곳에서 벌레를 잘 제거하는 사람이면 남녀를 불문하고 추천하여 올려라."
우승지 권경희는 성종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제주도의 의녀 장덕은 치충을 제거시키고 코와 눈 등 모든 부스럼을 제거할 수 있었는데···" 이처럼 성종의 치통은 매우 심각한 것을 알 수 있다.
임금이 양치질하는 것을 조선의 궁중에서는 '수부수하오시다'라고 표현 하였다. 연산군 12년 2월 28일에 연산군은 봉상사의 중에게 '양치질하는 나무를 만들어 바치라'고 명하였다. 임금은 소독이 잘 된다는 버드나무로 칫솔을 만들어 양치질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치질을 '양치'(養齒)나 '양치'(良齒)로 한자를 쓰는 사람이 있으나 잘못이다. 한자어로 오분석하고 잘못 유추한 결과이다. 고려 시대의 문헌인 〈계림유사〉에는 '양지'(楊枝)로 나타나 있다. '양지' 즉 '버드나무 가지'로 이를 닦은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나무를 깎아서 '이쑤시개'를 만들어 쓰듯이 버드나무 가지를 잘게 잘라 이를 청소했다고 생각한다.
조선시대 문헌 〈역어유해〉에는 양치질을 '양지믈imagefont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버드나무 가지를 가늘게 깎아서 이 사이의 음식 찌꺼기를 제거하고 물로 씻어내는 것이 '양지믈imagefont다'이었을 것이다. 〈박통사〉 중간본에는 '양지질imagefont다'라고 하였고 〈구급방〉에서는 '양지imagefont다'로 표기하였다.
그리고 〈동문유해〉에서는 '양치믈imagefont다'로 나타나고 〈여사서언해〉에서는 '양치imagefont다'로 나타나며, 〈한청문감〉에서는 비로소 오늘의 형태인 '양치질imagefont다'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이'를 청소하는 것을 '양지믈하다'라고 했던 것인데, 후세에 이것을 '이'의 한자인 '치'에 연결시켜 '양치하다'로 유추하여 썼으며, 여기에 접미가 '-질'이 붙어서 오늘의 '양치질하다'로 변한 것이다.
한편 한국어 '양지(楊枝)'는 일본으로 건너가서 '요지'로 읽는데 '이 쑤시개'를 뜻하는 일본말 요지(楊枝, ようじ)가 된 것이다. 이것이 일제 때에 다시 한국어에 들어와서 이쑤시개를 '요지'라고 쓰고 있으니 참으로 역설적인 얘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