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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달한거북이38
활달한거북이3823.03.18

광해군이 실시한 중립외교가 무엇인가요?

영화를 보고 있는데요, 이병o이 주연한 영화요~

광해군에 대해 나오는데 백성들을 위해,

백성을 살리기 위해 군대 파병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요,

여기 중립적으로 뭔가를 한 거 같은데,

이때 시행한 중립외교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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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10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3.18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당시 임진왜란으로 명과 조선은 쇠퇴하고 후금이 점차 세를 키우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두 세력이 충돌하자 광해군은 이런 국제 정세를 파악하고 명이 임진왜란때 도와줬으니 결국 파병을 하면서도 강홍립으로 하여금 정세를 파악하여 상황에 맞춰 행동하라 지시하였죠. 강홍립은 후금에게 둘러쌓이자 항복하고 명의 요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왔으며 조선은 후금과 싸우길 원하지 않는다는 등 호소하였고 후금 입장에선 명과 싸우는 중에 우호적인 입장을 내비치는 조선과도 싸울 이유가 없으므로 죽이지 않고 포로로 삼죠.

    조선 측은 명을 지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후금과 친선을 도모하여 중립적인 정책을 취하면서 광해군은 국제 정세를 정확하게 읽고 현실적이고도 실리적인 정치를 펼쳤고 이것이 광해군의 중립외교입니다.

    그때 조선에서 50만명 이상이 포로로 끌려 갔다고 합니다. 그 때는 기계가 없어서 생산수단이 사람이었습니다.

    끌려간 사람들은 모두 일을 할 수 있는 나이대의 남자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자들이었습니다.

    조선이 망한 가장 큰 이유가 그때부터 시작 되었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라고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광해군의 중립 외교>

    광해군은 후금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중립 외교 정책을 폈다.

    그러나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사림은 이를 명에 대한 배신 행위로

    간주하였다.


  •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너무 뛰어난 정책이었습니다.


    인조반정으로 병자호란이 발발 했잖아요.


    그때 조선에서 50만명 이상이 포로로 끌려 갔다고 합니다.


    그때는 기계가 없어서 생산수단이 사람이었습니다.


    끌려간 사람들은 모두 일을 할 수 있는 나이대의 남자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자들이었습니다.


    조선이 망한 가장 큰 이유가 그때부터 시작 되었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 입니다.


  • 안녕하세요. 김보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해군이 명과 새로운 강국인 후금과 대립을 원치 않았ㄱ 때문에

    중립외교를 펼쳤습니다. 그 당시에는 잘 선택한 일이였지만

    하지만 이 일로 인조반정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해군 대 시행한 중립외교는 오늘날에 높이 평가되는 국익을 우선시 한 실리외교에 가깝습니다. 임진왜란으로명은 막대한 재정을 쏟아부어 국력이 약해지고 만주에서 성장하는 이민족인 여진을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누르하치가 건국한 후금은 이 틈을 타 강성해지는데 임진왜란 때 원군파병을 제안할 정도였습니다.

    임진왜란 후 후금은 더욱 강성해져 명을 공격하기에 이르고 이에 명이 파병을 요청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정세를 보면 명이 지는 해 후금이 뜨는 해였던 것인데 광해군은 명에 원군을 보내는 명분을 쌓고 후금에는 어찌할 수 없이 명의 요구를 들어준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밀지를 보내 일찍 후금에 투항해 우리 군사의 피해, 또 장차 후금의 조선침략을 막으려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조정에 알려지고 또 광해군을 지지한 집권붕당인 북인의 전횡 등이 겹쳐져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인목대비를 폐하고 적자인 영창대군을 죽인 것도 반정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홍휴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광해군을 지지하는 북인정권은 명과 후금사이에서의 중립을 지키는 정책을 실시하여 전쟁을 피했다고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립외교는 한 나라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각 나라에 같은 비중을 두는 외교입니다.

    광해군이 통치 할 당시 조선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던 명나라의 국력이 약해진 틈에 여진족이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명나라에 전쟁을 선포합니다.

    조선에서는 강홍립 장군과 군사 1만명을 명나라에 보내고 광해군은 강홍립 장군에게 적당한 때에 후금에 항복하라고 했습니다.

    조선은 명나라를 도와야 했지만 후금은 명나라보다 더 강하여 후금과도 적대적인 관례를 만들고 싶지 않은 이유로 이러한 방법을 생각했고 , 이에 조선은 전쟁에 휘말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조선은 명나라를 돕는 한편 후금과도 다투지 않는 실리적인 대외정책을 편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해군이 실시한 중립 외교는 중국과 일본의 갈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조선이 중립을 유지하며 양쪽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외교 정책입니다. 이러한 외교 정책은 광해군의 대외 정책 중 하나로, 광해군은 중국과 일본 모두와 교류를 유지하면서 왕조의 안정과 국가의 발전을 추진하였습니다.

    이러한 중립 외교는 광해군 시대에 조선의 대외적인 위상을 높이는 데 일조하였으며, 특히 일본의 통사부가 조선과의 관계를 강화하고자 했던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후,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지배당하게 되었으며, 이후로는 외교적인 자유가 상당 부분 제한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 분야, 재무설계 분야, 인문&예술(한국사) 분야 전문가, 지식iN '절대신 등급' 테스티아입니다.

    ✅️ 중립외교는 명나라와의 대의 명분을 지키면서도, 후금(청)과도 어느정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조선의 실익을 추구하는 '실리 외교'의 핵심이며, 단 이런 실리 외교는 곧 서인들에게 인조 반정의 명분을 주게 되어 광해군이 쫓겨 나게 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 - - 추가적으로 궁금하신 점은 의견으로 남겨주시면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성의껏 답변을 드려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 -


  • 안녕하세요. 광해군이 실시한 중립외교는 현재의 실시간 중립국 개념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17세기 중반 조선시대에는 외교적 지위가 높은 나라만이 외국과 교류를 할 수 있었으며, 그 외의 나라는 모두 불법적으로 분류되어 교류를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광해군은 중립국으로 선언해 당시 교류를 하지 않던 일본과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허가하였습니다. 이를 실시간 중립외교라고 부르며, 이후 조선시대 외교사적으로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