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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동
이로동24.03.11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은 안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만약에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안펼치고 외국과 수교를 적극적으로 맺고 외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면 지금과 같은 대한민국과는 다른모습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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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5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만약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하지 않고 보다 적극적인 외교를 펼쳤다면 한국의 역사는 완전히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장점만 이었을 것이라고는 말하기가 힘들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흥선대원군이 국제 정세 파악을 잘하고 지혜롭게 대처를 하였다면 우리나라가 일본을 식민지화 했을듯 합니다.

    정치를 하려면 국가를 위해서 몸을 던지는 자세로 해야 합니다.

    국가 간에도 치고 빠지기를 잘해서 국가에 이익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역사에서 만약은 없지만 흥선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없었다면 우리나라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나라가 교량적 위치로 대륙세력이 해양으로 해양세력이 대륙으로 진출하기 좋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세기 전반에 이미 산업혁명을 완료하고 근대 자본주의 국가로 성장한 영국·프랑스·미국·독일 등 서구 열강은 상품 시장과 원료 공급지를 구하려 군함을 앞세우고 아시아 각국에 문호 개방을 강요해 왔는데 우선 영국이 1842년 아편전쟁을 일으켜 중국과 강제적인 통상 관계를 맺고 이어 1860년에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여 굴욕적인 베이징조약을 맺었습니다. 이즈음 조선에도 이양선(異樣船)이 자주 출몰하여 위기의식이 고조되었는데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정권을 잡은 대원군은 밖으로 쇄국정책을 더욱 철저히 하여 외국과의 교역을 엄금하는 한편 안으로는 천주교도들을 외세를 끌어들이는 앞잡이로 간주하여 가혹한 탄압을 가해 1866년(고종 3년) 병인사옥(丙寅邪獄)을 일으켰습니다. 이때 조선인 천주교도들뿐 아니라 프랑스인 신부 9명도 처형함에 따라 프랑스 함대가 내침함으로써 병인양요가 일어났고 이어 1871년에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베이징에 있던 미국의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가 군함 5척을 끌고 침략하여 신미양요가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만일 일본처럼 메이지 유신을 좀더 적극적으로 했더라면 적어도 일본의 식민지로 36년간을 살지는 않았을 것 입니다.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무래도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하지 않았다면

    이에 따라서 근대화가 조금 더 빨랐을 것이고 우리나라가

    더 발전할 여지가 있으니 당시의 국력이 약하여 일본에 식민지가

    안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