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대비와 폐비윤씨는 극도로 좋지 않았었나요?
폐비윤씨가 사약으로 죽게 될때 상당히 주도한 사람이 인수대비라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인수대비와 폐비윤씨는 어떤사이였으며 어떤 갈등을 보인건가요?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인수대비와 폐비 윤씨 사이의 관계는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인수대비는 폐비 윤씨의 행동과 태도에 대해 매우 불만족스러워했으며, 이로 인해 두 사람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폐비 윤씨는 조선 성종의 두 번째 왕비이며 연산군의 어머니입니다. 성종의 원비인 공혜왕후가 승하하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투기와 저주행위 등의 부도덕한 행위로 파면되어 1479년 폐위되어 사사되었습니다. 인수대비는 세조의 며느리였고 성종의 어머니였으며 연산군의 할머니입니다. 의경세자인 남편이 20세 요절하자 그녀는 2남1녀를 데리고 궁밖에서 생활하다가 예종이 죽자 한명회와 정희왕후(인수대비의 시어머니)의 영향력으로 성종을 왕위에 앉히게 됩니다. 인수대비는 내훈이라는 책을 펴낼 정도로 지적이며 유교적인 덕을 중시하였으나 폐비 윤씨는 자유분망한 성격이었기에 충돌은 불가피하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윤씨를 사사하는데 적극 앞장 선 사람은 남편인 성종 자신입니다. 폐비 윤씨가 대비들과 그다지 사이가 좋진 않은 듯 했으나, 생사여탈은 국왕이 결정할 사안입니다.
성종이 폐비 윤씨를 사사하기로 한 이유는, 윤씨를 폐하여 사가로 내쳤음에도 대신들이 세자를 의식해 윤씨를 두둔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즉, 세자가 자신의 뒤를 이어 즉위했을 때 윤씨가 살아있다면 반드시 복위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궁궐에는 피바람이 불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아무래도 성종은 이를 경계한 듯 싶습니다.
그리하여 대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폐비 윤씨를 사사하라고 결정한 것입니다.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폐비 윤씨는 연산군의 생모로 성종의 후궁으로 있다가 숙의로 봉해졌고, 성종의 총애를 받아 1476년 왕비로 책봉되고, 연산군을 낳은 인물입니다. 그러나 왕비가 된 이후 투기가 심해 부덕한 일(성종의 총애를 받는 엄귀인과 정귀인을 저주하는 주술)을 자주 일으켰고, 결국 왕과 후궁을 독살하려 한다는 협의로 빈으로 강등됩니다. 사실 성종에게는 많은 여자들이 있었고, 이를 지켜본 왕비(윤씨)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습니다. 1479년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냈으며, 성종의 모친인 인수대비(소혜왕후)에게 격분하게 되고, 폐비에 이릅니다. 그런데, 오히려 성종이 적극적이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인수대비는 아들의 의견에 따랐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정희왕후(세조비), 인수대비 등 후궁들을 모함하면서 세자의 생모임에도 사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