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조약이 불평등 조약임에도 체결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근대시대에 우리나라는 청나라, 일본 뿐만 아니라
서양의 각국과도 불평등 조약을 맺었습니다
그중에서 강화도 조약이 역사적으로 불평등 조약이라 가장 알려진 조약중 하나인데
당시 조선은 왜 불평등 조약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체결하게 되었나요?
그 이유가 내부적 요인인지, 외부적 강압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65년 왕정복고로 천황 친정 체제를 마련하고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단행하여 근대국가로의 급속한 발전을 이룩한 일본은, 조선과의 근대적 국교 관계를 맺기 위해 교섭해 왔다.
그런데 조선은 국서의 서식이 종래와 다르고 대마도주 무네씨[宗氏]의 직함이 다르다는 이유로 접수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서계(書契)문제가 얽혀 교섭은 한때 난항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하야, 민씨 척족정권의 재등장으로 통교 교섭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또한 영의정 이유원(李裕元)과 우의정 박규수(朴珪壽)는 더 이상 통교를 거절하는 것은 국가 이익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건의도 교섭에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도 서서히 변하여 대원군의 통상거부정책을 적극 지지하던 척사위정세력(斥邪衛正勢力)과는 달리, 북학과 서학의 영향을 받은 박규수· 오경석(吳慶錫) 등에 의해 대외 개방을 주장하는 개화 세력이 자라고 있었다.
한편, 청나라는 조선에 대해 프랑스 · 미국과의 국교를 권고하였으며, 일본의 대만 정벌의 소식도 대일본정책의 전환을 촉구하는 내재적 영향력이 자라고 있었다.
내용
이러한 시세에 편승한 일본은 조선 현지의 사정을 정탐하고 무력 시위에 의한 국교 촉진의 방안을 건의한 모리야마[森山茂]의 권고를 받아들여 군함 3척을 파견, 부산항에서 함포사격 연습을 한다는 구실로 조선 정부에 간접적인 위협을 가해 왔다.
또, 일본은 운요호[雲揚號]를 수도의 관문인 강화도에 출동시켜 연안 포대의 포격을 유발시킨 운요호사건을 기회로 군사력을 동원한 강력한 교섭을 펴, 마침내 1876년 2월 3일(음력) 강화 연무당(鍊武堂)에서 전권대신 신헌(申櫶)과 특명전권판리대신(特命全權辦理大臣)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 사이에 12조로 된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하였다.
중요 내용은
-조선은 자주의 나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제1조)
-양국은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교제 사무를 협의한다 (제2조)
-조선은 부산 이외에 두 항구를 20개월 이내에 개항하여 통상을 해야 한다(제5조)
-조선은 연안 항해의 안전을 위해 일본 항해자로 하여금 해안 측량을 허용한다(제7조)
-개항장에서 일어난 양국인 사이의 범죄 사건은 속인주의에 입각하여 자국의 법에 의하여 처리한다(제10조)
-양국 상인의 편의를 꾀하기 위해 추후 통상 장정을 체결한다(제11조)
특히, 제1조는 조선과 청나라와의 관계를 약화시키려는 의도로 평가되며, 제5조는 원산과 인천을 개항하게 함으로써 통상 업무 이외에 정치적 · 군사적 침략 의도가 내포된 것이었다. 그리고 제7조는 조선 연안 측량권을 얻음으로써 군사작전 시 상륙 지점을 정탐하게 하였으며, 제10조는 영사재판권을 인정한 불평등조약이었다 할 수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강화도조약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내에서도 개항하여 신문물을 받아들여야겠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일본은 미국에게 당한 것 처럼 똑같이 조선에게 불평등 조약체결을 요구하는데, 조정의 입장에서는 가까운 나라이니 좋게지내는 것이 좋겠다 하여 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이 조약은 일본의 무력 행위에 굴복하여 반강제적으로 맺은 조약이었고, 조약 내용 또한 조선에게 지극히 불리한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조선이 최초의 근대적 조약을 이처럼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체결한 이유는 당시 조선의 조정이 근대적 조약 체결에 무지하여 근대화 과정에 있던 일본의 술수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선은 강화도 조약의 체결 이후 서구 열강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여 세계사의 흐름에 합류하며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되는 성과도얻었습니다.
출처 -지식백과 강화도조약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75년 운요호라고 하는 자국 군함을 동원하여 우리 영해에 불법 침입해서 무력 시위를 일으킨 일본은 이를 빌미 삼아 1876년 강화도 연무당에서 조선 외교 대표와 조약을 체결합니다. 이것은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지만 쇄국과 척화의 영향으로 국제법에 밝지 못했던데다 군사적 협박까지 받고 있었던 조선은 일본의 불평등 조약 내용을 걸러내지 못했고 결국 개항과 동시에 치외법 권과 해안 측량권 등을 일방적으로 허용하여 국익 침해의 소지가 있는 불평등 조약이 성사되게 됩니다. 결국 강압에 의한 조약 체결인 것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화도 조약은 일본의 군사력을 동원한 강압에 의해 체결된 불평등 조약입니다.
즉 나라 밖, 외부적 강압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하야, 민씨 척족정권의 재등장으로 통교 교섭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또한 영의정 이유원(李裕元)과 우의정 박규수(朴珪壽)는 더 이상 통교를 거절하는 것은 국가 이익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건의도 교섭에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도 서서히 변하여 대원군의 통상거부정책을 적극 지지하던 척사위정세력(斥邪衛正勢力)과는 달리, 북학과 서학의 영향을 받은 박규수· 오경석(吳慶錫) 등에 의해 대외 개방을 주장하는 개화 세력이 자라고 있었다.
한편, 청나라는 조선에 대해 프랑스 · 미국과의 국교를 권고하였으며, 일본의 대만 정벌의 소식도 대일본정책의 전환을 촉구하는 내재적 영향력이 자라고 있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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