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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찬밀잠자리170
대찬밀잠자리17023.06.21

간도나 만주지역이 원래 우리나라 영토였나요?

우리나라 옛고토라는 지도를 보니까 간도지역이나 만주지역이 우리나라 영토로 되어있던데 실제로 우리나라가 저 지역을 가지고 있었던적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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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2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구려 발해가 망함으로 중국땅이 되었습니다

    그후 고려가 선조들의 땅을 되찾으려 출병했다가 이성계의 반란으로 좌절되어 반도국가로 전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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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21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대 간도에는 읍루(邑婁)와 옥저(沃沮)가 소국을 이루고 있었으며, 이후 고구려와 발해가 간도 지역을 차지하였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전기 이르기까지 여진족은 간도 각지에 흩어져 살았다. 그들은 ‘번호(藩胡)’라는 이름으로 조선에 조공주3을 바쳤고, 조선에서는 그들이 생활 물자를 교역할 수 있도록 북관개시(北關開市)의 기회를 주었다.


    간도는 두만강과 북동쪽 해란하(海蘭河)에서 혼춘하(琿春河)에 이르는 여러 지류의 연안을 중심으로 한 분지와 구릉으로 이루어졌다. 산지가 발달하여 땅이 기름지고 산에 나무가 무성하여 각종 자원도 풍부하였다. 그러나 여진족은 농경보다 유목과 수렵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비옥한 간도가 오랫동안 개척되지 못하였다.


    비옥한 간도를 개척하여 농경지로 만든 것은 우리나라 사람이었다. 간도에 우리나라 사람이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 철종 말부터 고종 초였다. 세도정치의 학정과 수탈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관권주4이 미치지 않는 두만강 너머로 이주하였고, 1869년을 전후하여 함경도 지방에 대흉년이 들자 굶주린 백성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간도 지방에 들어가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1910년을 전후하여 일제의 침탈에서 벗어나고자 하거나 항일운동의 새로운 기지를 구축하고자 간도로 이주하는 사람이 대폭 늘어났다. 1910년 9월부터 1911년 12월까지 간도로 이주한 우리나라 사람은 2만 5193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강행함에 따라 농토를 빼앗긴 농민들이 간도로 이주하는 일이 계속되어, 1926년 간도에 있는 우리나라 사람의 호수는 5만 2881호로, 9,912호인 중국인의 호수보다 많았다.


    농토도 전체의 52%나 차지하였고, 허룽과 옌지 지방에서는 평균 72%의 농토를 소유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농민들이 간도로 이주한 이유는 반봉건 · 반제국 투쟁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간도 지역에서는 이주 농민들이 공급하는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이 풍부하여 항일투쟁이 활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간도 지역에서의 항일투쟁도 1931년 만주사변주5을 계기로 일제가 간도 지역에 만주국을 수립하자 일시 중단되었다.


    간도 지역은 1945년 8월 18일 중국 공산당에 의해 점령되었다. 그리고 1952년 8월 29일부터 9월 3일까지 연변의 여러 민족과 각 계층이 모여 제1기 인민대표회의에서 연변조선민족자치구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때 임시정부는 옌지시와 옌지 · 훈춘 · 허룽 · 왕청 · 안투(安圖) 등의 5개 현을 관할하였다.


    1955년 12월에 개최된 자치구 제1기 인민대표대회 제2차 회의에서 연변조선민족자치구를 연변조선족자치주로 변경하였다. 1956년 12월 8일에는 중국 길림성위원회를 결정하여 연변 지위를 중국연변조선족자치주위원회로 변경하였다.


    1966년에 문화대혁명주6이 일어나자 1967년 1월부터 자치주의 당과 정부 기관 등은 마비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 해 3월부터 4월에 연변 자치주의 당과 정부 기관에 대해 군사 관제가 실시되었다. 1968년 8월 18일에는 길림성 혁명위원회의 비준을 거쳐 연변조선족자치주혁명위원회가 성립되어 옌지 · 투먼[圖們]의 2개 시와 옌지 · 훈춘 · 허룽 · 왕청 · 안투 · 돈화(敦化) 등 6개 현을 관할하였다. 1970년 4월 27일에는 중국공산당 연변조선족자치주혁명위원회 핵심 소조가 성립되었다.


    1971년 3월에는 제3차 자치주당대표대회가 소집되었으며, 중국공산당 연변조선족자치주위원회가 회복되었다. 1980년 2월 연변조선족자치주혁명위원회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정부로 바뀌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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