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박위(朴葳)는 고려 말 우왕(禑王) 때 우달치(迂達赤)[고려 후기에 창설된 몽골식 군관]가 되었다. 1375년(우왕 2) 겨울 왜구의 노략질로 폐허가 된 김해의 부사가 되어 난민을 구호하고 부서진 집들을 고치는 등 복구 작업에 힘썼다. 당시 왜구들은 쓰시마[對馬]와 이키시마[壹岐島]에 근거지를 두고 수시로 고려 연안에 칩입, 노략질을 일삼았다. 고려에서는 여러 차례 일본 막부에 사신을 보내 왜구의 단속을 요구하였으나 막부의 명령이 변방에까지 미치지 못하였다. 이에 박위는 왜구 방어책으로 여러 성을 축조하였다.
박위는 김해 부사를 지낼 때 김해 분산성(盆山城)을 쌓았고, 1384년(우왕 10) 경상도 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일 때는 이문화(李文和)로 하여금 울산 신학성(神鶴城)을 쌓게 하였다. 동래읍성에 대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원수 박위(朴葳)가 1387년(우왕 13) 8월 19일 공사를 시작하여 한 달 이상 걸려서 완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박위는 이성계(李成桂)와 뜻을 같이하여 1388년 경상도 상원수(慶尙道上元帥)로서 요동 정벌(遼東征伐)에 나섰다가 위화도에서 회군, 최영(崔瑩)을 몰아내는 데 공을 세웠다. 1389년(창왕 1)에는 전함 100척을 이끌고 쓰시마 정벌에 나서 적선 300여 척을 불태우는 등 대승을 거두고 돌아왔다. 이후 왜구의 노략질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출처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