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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따운안경곰70
아리따운안경곰7024.02.08

실록의 기본이 되는 사초들은 왕들이 개입할 수도 있었나요?

왕이 죽으면 왕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데

그 기록의 뿌리가 사초라고 알고 있습니다

연산군도 조부인 세조의 사초 기록 문제도

유자광이 키워서 연산군을 역대급 폭군이 되게 했다고 아는데

사초를 선택할 때 왕의 개입이 가능한 부분이었나요?

오로지 사초는 신하들이 선택해서 실록에 담는 것인지

왕이 개입해서 사초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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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2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초는 왕들이 볼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양반사회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사초는왕이라고 함부로 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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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초는 사관이 왕과 관료의 행적과 대화를 기록한 것으로 실록 편찬의 기초 자료입니다. 사초는 매일 작성하여 춘추관에 보관하고, 집에서도 다시 작성하여 가장 사초로 보관했습니다. 국왕의 사후 실록청이 설치되고 사초를 바탕으로 실록을 편찬한 다음 세초 과정을 거쳐 재활용합니다.

    사초는 살록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왕조차 볼 수 없었으며, 사관은 사초의 내용을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실록도 편찬 한 이후 봉인하여 사고에 보관하였습니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의 객관성을 상징하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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